TV 홈쇼핑의 배신

신포도의 가르침

by ocasam

물건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매장에 가서 직접 사는 것이고 둘째는 인터넷이나 TV홈쇼핑을 이용하는 것이다. 시간을 정하고 차를 타고 매장에 가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좀 더 만족한 쇼핑을 위해 그런 것쯤은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정해둔 매장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 중간중간에 수많은 복병들이 있다. 매장마다 화려한 물건들이 우리들의 발길을 더디게 하는 것이다. 눈에 띄는 물건이 있으면 들어가 대충 훑어보고 나온다. 그러나 확실히 정해 둔 물건이 있기에 그 물건을 바로 사지는 않는다. 가끔 충동구매라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미리 정해 둔 물건을 사기 전에는 쉽게 다른 물건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문제는 홈쇼핑이다.


보고 싶은 방송을 보려고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여러 가지 홈쇼핑 채널을 지나야 한다. 필요한 물건을 찾아가는 중간에 들어가게 되는 매장들처럼 말이다. 어느새 한 채널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리모컨을 바닥에 내려놓고 화면에 집중한다. 내가 텔레비전 화면처럼 딱딱하게 정지되고 텔레비전 화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홈쇼핑에 나오는 물건들은 어찌 그리도 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인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물건들은 다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진행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빛나는 날개를 달고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신통방통한 일은 또 있다. 이쪽 화면에서 의사나 전문가들이 예능 프로그램처럼 건강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저쪽 화면에서는 아까 그 전문가들이 말한 건강에 좋다는 제품을 선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김치나 갈비탕을 판매하는 화면이 나온다. 진행자들은 보통 장인, 명장, 명인이이라는 분들과 같이 진행을 한다. 그분들이 화면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고객들에게 믿음과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장인이 그윽한 눈길과 섬세한 손끝으로 재료를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살펴본다. 조리 과정을 시범 보이는 동작에서도 장인 정신을 충분히 감지하며 고객들은 서서히 물건을 살 준비 자세를 충실하게 갖춰 가게 된다.


‘남아 있는 물량이 별로 없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 해에는 이게 마지막 방송이다’

방송이 거의 끝나갈 즈음 진행자들의 말은 빨라지고 톤은 높아진다. 안 사면 진짜 큰 일 날 것처럼 고객들을 안절부절못하게 몰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수많은 고객들이 이미 주문 버튼을 눌렀다는 사실을. 완판을 위해 마지막까지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진행자의 끝인사를 듣고 고객들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고작 하루 이틀도 길게 느껴지게 했던 행복한 기다림은 드디어 택배 상자를 문 앞에 끌어들인다. 개봉박두의 설렘은 칼로 박스를 열 때 날리는 약간의 스티로폼 가루 때문에 조금 약해지다가 물건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다시 원상 복귀된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제품을 보고 다시 한번 자신의 탁월한 선택을 대견해한다.

'오늘 저녁에는 김치를 곁들인 따끈한 갈비탕을 식구들에게 먹여야지'

쌀밥을 새로 짓고 평소에 안 쓰던 돌솥단지와 뚝배기까지 꺼내 놓는다.


쌀밥 위에 손으로 쭉 찢어진 김치 한가닥이 얹힌다.

'어 이상하다. 생각보다 아삭하지가 않네?'

진행자들의 손끝에서 붉고 싱싱하게 빛나던 그 김치가 아니다.

쌀밥 위로 솔솔 하얗게 오른던 김과 환상의 조화를 이루던 그 김치가 아니다.

'내일은 옹기 접시를 사서 그 위에 김치를 담아볼까나?'


돌솥단지에서 끓고 있는 국물 위에 송송 썬 대파를 한 움큼 뿌린다. 갈색 국물 위에서 대파 조각들의 색이 점점 연해진다.

'와, 초록이 원래 이렇게 예쁜 색이었나?'

입맛을 한 번 다신 뒤 국물과 고기 한 조각을 떠먹는다.

"어 이상하다. 뭐지?'

국물 맛은 담담하고 입 안의 고기는 푸석하고 뻣뻣하다.

진행자들의 젓가락 사이에서 낭창낭창하게 흔들리던 그 두툼한 수육이 아니다. 절로 침이 넘어가고 구수한 냄새가 화면 밖에서도 맡아지던 그 수육이 아니다. 일부러 똑같이 하려고 안 쓰던 돌솥단지와 뚝배기까지 꺼냈건만. 더 이상 이 수육은 그 수육이 아니고 이 국물은 그 국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무수한 물건들을 구매한다. 물건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현대인의 숙명이다. 우리가 사는 물건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만족감을 주고 있는가.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산 물건 중에서 100%만 만족감을 얻은 것은 반도 안 되었다. 비싼 물건이든 싼 물건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욕망이 채워지는 과정에 불과하고 그것들은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이다.


식구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이 김치가 맛있다든지 갈비탕 국물이 깔끔하다던가 그런 말을 한다면 물건을 산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지? 이 정도면 엄마가 한 것보다 훨씬 더 맛있지?"

하며 물건을 선택한 일에 어설픈 정당성을 불어 넣음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여우와 신포도'라는 이솝 우화가 생각난다.

배고픈 여우가 길을 가다가 먹음직스럽게 생긴 포도를 보고 포도를 따려고 온갖 수단을 써 보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던 포도를 딸 수가 없자 다음과 같이 혼잣말을 하며 떠납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 거야."

여우는 갖지 못한 것을 포기하며 자기 합리화를 한다.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실패했으니 툴툴거릴만도 한데 깔끔하게 툭 털어버리는 시크함이라니. 사람은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일단은 가져 보고 자기 합리화를 할 수 있으니 여우보다는 다행한 신세가 아닐까. 여우한테 한 수 배워 간다.


"재미있는 게 뭐 없나?"

나는 오늘도 TV 리모콘을 찾이 손에 들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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