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 학교에 다니던 때의 이야기다. 학교를 중심으로 좌우에 마을이 있고 뒤편에 야트막한 산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학교 담 넘어 산기슭에는 철 따라 꽃이 핀다. 양지꽃 진달래 개나리 갈퀴현호색 애기똥풀 개망초 나리꽃 달맞이꽃 쑥부쟁이 구절초 산국 탱자꽃 마타하리가 차례로 피고 진다. 이 마을에는 꽃보다 예쁜 아이들이 있었다.
이곳은 큰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온 곳이라 늘 조용하고 평화롭다. 산비둘기가 마을을 가로질러 휘휘 날아다니고 이따금 꿩의 울음소리가 한적함을 더한다. 그러나 가끔씩 마을 회관에서 들려오는 정제되지 않은 방송은 신경을 쓰이게 한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성능이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 음질의 스피커와 만나면 방송 내용이 도통 무슨 뜻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학교에서 공부 시간에 방송 소리가 들리면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그 공지 사항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어야 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생들과 학교 교직원들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최악의 상황은 마을 잔치가 있는 날 뽕짝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이 동네에서 25년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 식구는 거의 원주민에 가깝다. 이 마을 부녀회원이기도 한 나는 동네 폐품 수거하는 날이나 풀베기, 동네 청소하는 부역에 동원되기도 한다. 우리 집은 농사를 안 짓기 때문에 시간이 안 맞아 평일에는 나가지 못하는 대신 막걸리나 기부금으로 때우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민분들에게 우리 집은 여전히 ‘부역에 안 나오는 집’으로 찍히게 된다. 그럭저럭 주민들과 섞여 무리 없이 잘 지내는 것은 학교 선생이라 관대하게 봐주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요일 아침.
“아, 아, 잘 들리지요? 이장입니다. 동민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리겄습니다. 어제 저녁 안내한 대로 오늘은 우리 마을 주변 풀베기를 하겄습니다. 아침을 잡수신 동민 여러분께서는 서둘러 회관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할 일이 많습니다. 늦지 않게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먹은 이장님께서 마을회관 방송실에 앉아 방송을 시작한다. 방송은 5분 간격으로 실시간으로 이어진다.
“현재 다섯 명밖에 안 나왔습니다.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아침 시원할 때 작업을 해야 하니 빨리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반도 안 나왔는데 빨리 시작하지 않으면 정해진 시간까지 다 못 끝내니 얼른 얼른 나오시기 바랍니다.”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안 나온 집이 있어요.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어? 참 나 원.”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마지막 부분을 ‘바랍니다’ 대신에 ‘참 나 원’으로 끝을 맺은 이장님이 투덜거리며 방송실에서 나온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앞에 모여 있다. 협박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안 나온 집’이 우리 집인 것만 같아 나는 빨래를 널다가 중단하고 뛰쳐나간다.
방송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휴대폰이 흔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집에 전화가 있어도 집에 있는 일이 잘 없기 때문에 통화가 잘 안 된다. 꼭두새벽부터 일하러 나갔다 해 떨어져야 집에 들어와 조촐한 저녁을 먹는다.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되기도 전에 불이 꺼지는 집이 많다. 그러니 마을회관 방송실은 꼭 필요한 공간이다.
마을회관에서 마이크를 잡는 사람은 이장님 말고도 여럿이다. 농사철이 시작되기 전 1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마을 잔치에는 잔치 전날에 돼지를 잡는데 이장님이 방송으로 남자들을 나오라고 한다. 돼지 울음소리가 마을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나는 내일 잔치가 열리면 국밥을 안 먹겠다고 다짐한다.
회관 옆에 사는 아저씨는 내일 오전에 동네 앞 들판 보또랑(봇물을 대거나 빼게 만든 도랑) 청소를 하는 날이니 도구를 준비해서 논으로 나오라고 방송을 한다. 5월 8일 어버이날에는 면사무소에서 주관하는 노인잔치가 열리니 많은 참여 바란다는 노인회장님의 방송도 있고 광복절 날에 면 체육대회가 열린다는 마을 이장님의 방송도 있다. ‘동민여러분’들은 듣고 싶든 듣고 싶지 않든 좌우지간에 방송을 죄다 들을 수밖에 없고 여기서 취사선택하면 된다.
아, 마을의 또 다른 소음을 빠뜨릴 뻔했다. 5일에 한 번씩 이른 새벽에 와서 아침잠을 깨우고 가는 두부 장수 트럭과 방충망이나 깨진 유리창을 고치는 기술자 아저씨 트럭, 개 삽니다 라고 외치고 다니는 개장수 트럭 등 여러 종류의 다양한 장사 트럭이 마을을 휘젓고 가지만 최고의 소음 트럭은 단연 잡화점 트럭이다. 얼마 전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 이병헌 배우가 연기를 하기도 했다. 생선, 야채, 돼지고기, 닭고기, 플라스틱 바가지, 수세미, 행주, 퐁퐁, 슈퍼타이, 샴푸, 식용유 등 없는 거 빼고 다 파는 이 트럭이 최고인 이유는 보통 관광버스 춤출 때 틀어주는 뽕짝 디스코 메들리를 최대의 볼륨으로 틀고 다닌다는 것이다. 트럭은 보통 10분 정도 머물다 가는데 공부 시간과 겹치기라도 한다면 10분 정도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 나는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린다. 집에 학생이 없는 어른들은 나를 그냥 선생이라고 부른다. 할머니들은 나를 논산댁으로 부르고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은 선생님 또는 대식이 엄마라고 부른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마을에서는 대식이 엄마인 셈이다. 그러나 반드시 장소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들 편의대로 부를 때가 더 많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성씨다. 이 마을에는 강 씨 성을 가잔 사람들이 많았고 남편의 성도 같은 강 씨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 같은 성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이 이해하기 어렵고 어색했다. 이사 온 이튿날 이웃에 사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아저씨는 나를 제수씨라고 불렀고 아주머니는 나를 동시(동서)라고 불렀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아들과 며느리는 나에게 아지매라고 불렀다. 그들의 아들, 딸들은 나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호칭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사람들이 친척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고 실제로 남들과 다르게 교류하였다.
지금은 그 마을을 떠나 이사를 나왔지만 소박하고 열정적인 마을 사람들, 치열하게 살아가던 트럭 아저씨들, 순진하고 귀엽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가끔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