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몽상이라는 단어보다 오히려 망상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한다. 그것은 근거가 없을 뿐이지 절대 헛된 생각이 아닐뿐더러 실현성이 없다는 장담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망상을 제일 많이 하는 때는 아마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어딘가 향하는 때인데 몇 가지 의식이 있다.
일단 나는 내가 승차한 차에서 나는 소리나 느껴지는 감각(이를테면 멈추고 서는, 움직이는 때의 느낌)이 무색 해질 정도로 음악의 향을 고취시킨다. 더 높은 청각으로 촉각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하나를 하며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일종의 그런 느낌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창밖의 풍경과 내가 있는 안쪽의 사람들이 비치는 잔상을 겹쳐 바라본다. 지나가는 이미지와 실체가 아닌 상의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은 영화의 프레임과 비슷하다. 그러면 서서히 나의 시각도 마비되어 간다. 대게 현대사회는 핸드폰의 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은 극히 드물게 발생한다. 내 노래는 느낌들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나의 망상은 재빠르게 변환을 거듭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파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의 일본 노래를 틀어놓고 나는 그 뮤지션과 나를 혼용시킨 후에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나는 전혀 그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마치 알고 있다는 냥 감정들을 기복시킨다. 또는 한국의 댄스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기도 하고 이디엠의 템포에 맞추어 안무를 작곡하기도 한다. 내가 안무를 작곡한다고 한 이유는 이것은 나의 망상 속, 이미지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노래가 작곡되면 목소리를 통해, 청각을 통해 그것이 발화되고 들리는 것처럼 나의 움직임도 머릿속을 통해 그것이 표출된다.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한 사회문화에서 아메바가 등장한 적이 있다. 그것이 기업의 문화인지 어떤 이론 중 하나의 특징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것들이 증식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남는다. 아메바는 단세포 생물인데 이것에 관해 찾다가 단세포라는 단어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의 두 번째 의미에는 '행동 따위가 상당히 단순하고 원초적인 사람을 이르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생각들, 단순하게 그려진 모호한 이미지들. 그것은 나에게 굉장히 원초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이 뜻을 본 후에 나는 각성하게 되었다. 동식물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안에도 아메바는 하나쯤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하나의 생명 안에는 여러 많은 생명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체라는 생명, 영혼이라는 생명, 아메바라는 생명 등등. 그리고 어떤 생각이나 망상이 계속해서 증식해나가는 것은 내 안에 또 다른 많은 생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가 무엇인가를 까먹거나 잊거나 떠오르거나 하는 것은 그런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