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뮤직비디오는 가장 강한 메타포로 작용하는 영상 서사 중 하나인것은 분명하다. 누군가는 영상 속에 있는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이 굉장히 고전적인 방식이고 시대착오적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하지만 5분 내지 6분 안의 이 아름다운 뮤직비디오는 하루에도 수천 명 수만 명이 보는 대중적 장르로 진화했다.
쿵쾅쿵쾅, 찌지직 거리는 음악을 들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발라드는 꼭 뮤직비디오를 보는 편인데 신파적이어서 그런 것보다 내가 저 감정을 아니까, 저 상황이 너무나도 싫지만 그곳에서 비롯되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또 느끼고 싶을 정도로 외로우니까 보는 경우라고 할까. 나는 유난히 외로울 때는 외로운 음악을 듣고 슬플 때는 슬픈 영화를 보며 승화시켰다. 왜 그 감정을 탈피하기 위해서 반대의 상황을 만드는지 이해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것은 나의 정통법이 아니었다.
누군가 뮤비에 대해 말을 한다면, 거미의 '해줄 수 없는 일'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하나의 쇼트를 보며 이청아의 감정은 화가 났다가 이해를 할 수 없다가 결국은 헤어지자고 고한 남자 친구가 웃으며 통화하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에는 배신감도 아닌 그 장면을 말이다. 고개를 떨구는 장면에서는 나는 대사를 읊었다.
'나의 존재는 그랬던 거야.'
차마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보이지 못하고 맞은편 역에서 지나가는 기차를 따라 사라지는 그녀. 뒤돌아서 그 모습을 감춘다.
'그러니까 이제 너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아무 말도 못 들은 걸로(가사) 지나가고 사라지는 거야.'
왜 대부분의 모든 이들이 사랑 앞에서 가식적인가라는 단상을 처음으로 했다. 역시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아리송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사랑을 시작할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감정만이 유일하고 전부일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그것은 뼈아픈 고통과 슬픔을 수반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몰랐다. 처음에는. 뮤직비디오의 오프닝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생각해 봤는데, 그만 만나자."
"그게 말이돼? 좋아하는데 왜 헤어져."
"그러니까.. 나중에 니가 힘들까봐."
나는 두 번의 헤어짐에서 항상 사실도 아닌 말들을 이해하려고 애썻고 이별하는 그사람의 말을 어떻게든 그럴 수 있다는 내 안의 변명으로 합리화했다. 합리화는 자기자신이 하는건데 남을 합리화한다는게 말이되나. 그건 이타심의 부류인가. 나에게 그런건 없는데..
나도 그렇고 우리 주변엔 어쩔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많다. 막 헤어진 그의 너털웃음에서 정말 그녀를 사랑했을까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도 하지만 그도 그의 삶이자 생이, 그녀도 그녀의 삶이자 생이.. 결국엔 공존할 수 없는, 더 달라질 수 없는 정박된 것들의 부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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