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적인 삶

by 빈빈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삶의 욕구와 죽음의 욕구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아주 간단히 우리의 하루를 들여다보아도 깨어있는 시간에 우리가 행하는 것과 잠을 잘 때 우리의 상태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나 싶다.


기계적 삶이 반복되는 사람들에게는 권태와 무기력이라는 정신의 멈춤 현상이 찾아온다. 어제 누나가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처음 꺼냈고 나는 그것이 그 무서운 것이 바이러스처럼 우리 가족 내에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미 조금씩 퍼져나갔을 수도 있다.


눈물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것으로 힘든 지 알 수 있다. 무표정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은 당시의, 가까운 시간 내에서 발생한 슬픔이고 얼굴의 근육이 짖뭉기며, 동적인 표정의 변화와 함께 닭똥같이 흐르는 눈물은 시간이 겹치고 겹쳐서 아주 단단하게 굳어버린 슬픔이다.


누나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2년의 짧은 대학과정을 마치며 바로 사회초년생의 삶을 시작했다. 나와 누나가 다른 점은 나는 20대의 시기를 내가 해보고 싶은 것,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 시도해 본 것과는 달리 너무 빨리 사회에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나의 모습도 과도한 열정이라는 필요조건 속에서 번아웃이라는 고장이 충분조건으로 발생한다.


문득 2년 전 밤 누나와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으며 얘기했던 때가 생각난다. 누나는 메이크업 공부도 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지만 이미 사회생활과 직업 이후에는 결혼의 과정이 있다는 그런 얘기였던 것 같다.


사회적 관념과 분위기는 정말 무섭다. 한 사람을 곤혹에 빠뜨리거나 가능한 생각의 폭을 닫아버린다. 부모님 세대 그리고 할머니 세대는 비교적 결혼의 시기가 빠르고 젊었다.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사회가 변화의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아니 맞이하고 있을까?' 우리는 개개인이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독립적 존재라는 걸 되새기고 살아야 한다. 마치 프로이트가 말한 삶의 욕구와 죽음의 욕구가 내재한 인간처럼.


조금 앞으로 돌아가서 권태와 무기력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가장 능동적으로 때로는 환희에 가득 차 하는 행동은 바로 '소비'다.


이것은 자기 존재의 확인이다.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내비칠 수 있지만 그것은 허상,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일뿐이다. 또한 sns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모습을 업로드하는 행동 또한 소비의 갈래 중 하나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어떤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가장 첫 번째 욕구 생존의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쉽게 말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는 한 번쯤 추천하는 이론인데 가장 끝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는 적자만이 연명해 가고, 존중의 욕구는 무너진지 오래며 소속감과 사랑의 욕구도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변화하며 끝을 도래하고 있다. 2단계의 안전의 욕구 또한 무기력과 권태를 특징으로 하는 지금의 시대에서 무뎌진지 오래다.


1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사회의 지성인들은 무너지고 하락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어제 자위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에너지의 소비를 통해 나의 존재를, 안심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1인 시대에서 감각의 전유는 계속된다.


그래서 우리는 강박적인 삶이 되어 버렸다. 자기제어능력을 중요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책의 기록으로 남을 뿐 현실에서는 산화되었다.


다양한 갈래의 강박적 소비를 통해 삶의 욕구를 충전하고 권태와 무기력, 인격장애, 신경증의 퍼짐으로 죽음의 욕구가, 파괴가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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