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완성도와 인간의 의미 사이

이창동 감독 <시>

by 빈빈

영화를 문학적이다 연극적이다 미술적이다라 하는 것은

자못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제8의 예술로서 영화에게는 영광스러운 말이 아닐까 싶다. 그 모든 것이 영화적 완성도를 끌어올리며 어떤 장면으로, 어떤 대사로, 어떤 소리로 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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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의미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잊혀 간다. 기일이 아닌 이상 산 사람은 삶을 연명해 나가야 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그저 하나의 현상적 차원에서 '돌아갔다'라는 말과 함께 다음을 기약한다. 알츠하이머 환자인 미자에게도 죽음은 결코 먼 무언가가 아니었다. 희진의 죽음은 조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을 넘어 죽은 희진의 의미가 그저 합의금으로 변했을 때, 그녀는 허무함과 동시에 서서히 자멸해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공포를 느꼈을 테니 말이다.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삶은 꺼져가는 불빛, 자신의 의미를 잃어가는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미자에게는 남은 하나의 목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녀가 명사를 잊어가고 동사마저 잃어버릴 찰나 시의 수업들은 미자에게 발견과 성찰을 통한 의미 찾기 놀이나 다름없다. 지금껏 알고 있던 의미는 자의적이었을 뿐 제대로 된 관찰을 하지 못했던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한다.


하지만 시를 맞이하며 쓰려고 준비할 때 수반되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를 진짜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오래오래 바라보면서, 사과의 그림자도 관찰하고.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뒤집어도 보고, 한입 베어 물어도 보고, 사과에 스민 햇볕도 상상해보고. 그렇게 보는 게 진짜로 보는 거죠."


사과의 스펙트럼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공시적으로 또는 통시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다양한 존재양태처럼, 마치 여러 기호 작용으로 버무려진 인간의 삶처럼 미자의 민낯 또한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진실을 맞이한다. 자신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의 딸은 친구와 같은 둘도 없는 사이도 아니며, 요양사로 일하는 노동자 이상의 인간적 관계도 없다는 것을. 자신의 의미를 알아줄 사람은 없다. 오로지 시를 쓰기 위해 떠난 여정들 속에서 미자는 점차 어둠으로 점철되어 간다.

희진의 죽음, 사건을 덮어버리려는 사람들, 희진의 죽음을 속죄할 합의금을 벌기 위한 매춘은 시를 쓰는 미자에게 고통과 불안을 선사하지만 그것은 또한 시를 쓰는 주춧돌로 작용한다. 김용택 시인에게 시를 쓰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시상을 어디서 언제쯤 오는 것이냐고 묻는 미자는 이제 시를 쓸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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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기 위한 관찰의 연속선상에서 그녀가 수업 중 가장 아름다웠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을 보자면, 그녀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아주 어릴 적 이야기를 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단편 조각 속에서 억울하게 우는 북받침은 일종의 고해성사였을 것이다. 나에게 아름다움은 없다고, 시를 쓰기 위한 관찰과 아름다운 모습들은 고통의 연장선이었을 뿐. 그녀에게 세상은 시련으로 버무려진 일상일 뿐이었고 그 의미에 미美 뿐만이 아닌 추醜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미자는 고통스러운 시를 써 나간다.

그렇게 아네스의 노래가 탄생한다.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의 제목에 아네스는 동정 성녀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하는데 사욕과 사념, 불순물이 끼지 않는 깨끗함 그 자체를 말한다. 삶을 연명하면서 깨끗함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깨끗함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때 현실을 깨닫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동안 왜곡된 생각과 망상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자성하고 진실된 모습의 자신을 바라보는 미자를 말이다.

아네스의 노래는 또한 다양한 존재양태처럼 여러 시적 의미를 지닌 시이다. 동정 성녀를 범했던 사람들에 대한 재앙과 용서는 전설 속 이야기이지만 미자의 상황과 양립하며 모든 해결을 끝마치고 성녀가 행했던 순교의 모습대로 미자도 사라져 간다. 그래서 시는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들을 비춰주는데 -할 수 있나요, -하기를 이라는 바람과 소망으로 얼룩진 시는 사랑과 축복으로 물들며 끝을 맺는다. 현학적이고 심오한 시가 아닌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자 했던 짧은 여정은 삶에 대한 미련과 고통을 넘어,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고자 움직이는 미자를 통해 시적 완성도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엔딩 부분에서 미자는 아네스의 노래를 낭송하지만 곧바로 희진을 목소리로 변하며 두 사람은 합일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시를 읊조리는 시간 안에서 프레임의 공간은 일상 속 사람들과 사물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추고 관찰한다. 그러는 사이 시가 끝나갈 무렵 화면은 희진이 자살하기 직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정면 응시를 통해 미자와 희진이 처한 고통이 하나가 되며 우리는 경각심과 참회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적 완성도라는 시 창작은 한 인간의 의미와 삶과 연동된다. 희진이라는 인물이자 사건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미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자성이자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현상이다. 그리고 아네스라는 전설이자 종교는 삶과 죽음 앞에 한계를 지닌 우리가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잊지 말아야 할 도덕성 또한 보여준다.


시가 완성됨에 따라 미자는 사라지지만 미자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 줄 한 줄의 행들이 모여 연을 이루고 연의 시간들이 모여 '시'라는 의미, 한 사람의 존재성이 유유자적하게 흐른다. 우리는 우리의 의미를 찾고, 지속할 수 있을까. 또한 다른 사람의 의미를 함부로 치부하는 지금의 자태가 우리들의 의미를 점차 잃어간다는 것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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