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시간 속에서 부유하다

홍상수 <자유의 언덕>

by 빈빈

인간의 뇌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너무나도 당연시 여긴다. 하루의 아침과 저녁이라는 자연의 가시적 변화 외에도 달력, 브런치, 알람시계 등(모든 인간이 편집하고 창조해낸 것들)의 함축된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을 인지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간성이 인간에게는 중요한 요소이자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학문 또는 과학은 인간 행동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 존재자(인간)의 고유한 존재양식이 학문이나 과학에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그 존재양식 속에 있는 현상과 사물들은 일종의 편집된 시간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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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자신에게도 시간과 공간의 역사가 있듯이 영화에서도 시간과 공간은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하지만 <자유의 언덕>에서 시간성은 선형적인 대상이 아닐뿐더러 우연의 일부로 작용한다. 전자에서 언급했던 시간의 흐름, 즉 정적인 시간의 인식을 전복시키고 동적인 시간을 만들어내는 이 작품은 보는 이에게 혼란을 느끼게 한다. 대체적으로 우리에게 '영화'란 스토리와 플롯을 중심으로 발화되는 것을 우리는 영화라고 느낀다. 하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항상 영화 전체의 스토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플롯 또한 반복과 우연으로 혼재된다. 잠시 덧붙이자면 여기서 동적인 시간은 원인가 결과가 뚜렷하지 않은, 비선형적인 시간을 지칭한다. 시간이 우리에게 종속되지 않은 존재로서 우리가 우위를 점하지 않는, 시간 자체를 존재자로서 변수를 만들어내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적인 생명성을 말이다.

극도로 단순한 영화가 복잡해질 때 보는 이의 의구심은 커지고 영화의 예술적 매력은 존재감을 나타낸다. ‘모리’라는 일본인은 몇 년 전 어학원에서 ‘권’을 만났고 서로 좋아했지만 권은 건강을 위해 요양을 갔다가 다시 서울에 온다. 모리 또한 자국으로 떠난 뒤 권을 잊지 못하고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위해 다시 한국에 온다. 하지만 모리는 권을 만나지 못 한 채 그가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몇 쪽의 편지로 옮겼고 권은 그것을 훑어보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중요한 부분은 권이 모리가 남긴 쪽지를 떨어트려 이 시간성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영화는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뚜렷한 기승전결은 잠복된 채 흘러간다. 또한 진행되는 플롯 속에서는 모리의 1인칭 시점과 모리의 무의식 시점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모리가 서술한 시간, 권이 바라보는 모리의 시간, 모리가 꿈꾸는 시간, 모리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인지, 모리와 권이 결국 조우한 것인지,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편집-시간’이라는 영화의 한 구조를 무의미화 시키며 비로소 모든 것이 확실했고 의심의 여지가 없이 향유했던 우리들의 시간도 해체시킨다.


‘시간은 우리 몸이나 이 탁자 같은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 뇌가 과거, 현재, 미래란 시간의 틀을 만들어내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꼭 그런 틀을 통해 삶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유한한 시간(의식)과 무한한 시간(무의식)의 오묘한 충돌. 이 비선형적인 시간 속에는 항상 ‘모리’가 있다. 모리는 자유로운 존재다. 비인식적 시간으로 대변되는 그의 무의식엔 권을 만나고 싶은 그의 욕망으로 점철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영화 속 모리가 영진에게 쓴 편지 외에 존재하는 하나의 쇼트가 스쳐지나간다. 그것은 작중 모리가 꿈을 꾸는 장면의 쇼트인데, ‘모 - 리’라는 권의 음산한 사운드와 함께 모리는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의 왕 하데스가 관장하는 지하세계에는 다섯 개의 강이 있다. 그중 망각의 강인 ‘레테’에서 모리는 권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레테의 강 주변에 꿈의 신들이 사는 마을이 있으며 그곳엔 잠의 신 히프노스가 있다. 그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와 쌍둥이 형제인데 ‘잠-꿈-죽음’이 영화 속에서 형상화되는 모습을 통해 이 영화가 단지 시간만을 관철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지하고 기댈 곳 없는 현대사회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인 인간은 불안과 허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개별존재로서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형성되어가는 시대 속에서 올바른 자기 판단, 자기존재의 인식을 망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인간 전체의 삶에서 유한함이라는 시간성은 짧은 시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시간이다. 절망과 함께 자기 본연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삶에 스스로를 예속시킨다. 결국 영화에서의 불편함은 영화 내적인 플롯으로부터 외적인 각 개개인에게 전이한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다’가 아닌 인생은 짧으니 할 일도 정해져 있다‘라는 경각심을 말이다. 결국 우리는 주관적인 시간이 아닌 주체적인 시간을 찾아야 한다. 모리가 발화하는 시간에 대한 사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와 현존재 사이의 시간 속에서 말이다.

현존재는 단순히 다른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출현하는 존재자가 아니다. 현존재는 오히려 나라는 존재와 관련되어 있으며 이 나라는 존재 자체와 관계함으로써 존재적으로 구별된다. 그렇다고 본다면 현존재의 존재 구성은 그것이 나라는 존재이며, 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존재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내적 세계에서 누군가의 자식, 어떤 나라의 사람, 어느 회사의 사원 등 이런 식의 다양한 관계성을 가진다. 이런 관계성은 모리와 주변 인물 속에서도 뚜렷이 보인다. 그가 묶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에게는 일본 사람, 권에게는 사랑스러운 남자친구, 카페 사장 영선에게는 여행객으로 말이다. 이러한 현존재는 자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매개체이지만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또한 이런 다중적 존재성은 각각의 강렬도를 지니고 한 존재를 구성한다. 마치 필요조건, 충분조건 같은 이 구조는 결국 인간이 가진 시간의 유한성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이데거가 주창한 ‘세계-내-존재’ 존재처럼 영화도 비유하자면 ‘프레임-내-존재’로 구성된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비선형적으로 부유하며 자신의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 누구에게도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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