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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빈 Apr 24. 2020

Mean-ing
의미-형성하기의 불가피함

이창동 감독의 <시>를 다시금 떠올리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저마다의 이름을 갖게되며 개체로 식별된다.


2018년도 11월 탄생 날짜에 맞춰 홀로 군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들렸던 한 산사의 돌에는 인간은 성별, 나라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나의 몸 만한 돌에 쓰여져 있는 글이 왜이렇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걸까. 그 이유는 그것에 동의하다기 보단 반신반의함에 있어서 인상에 남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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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스스로가 의미가 없는, 버려진 존재같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몇 년 전 썼던 영화 평론 중 하나인 이창동 감독의 <시, 2010>가 생각났다. 등장하는 인물은 아주 가냘픈, 인지기능을 상실해가는 한 노년의 여인이다.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질병 중에 가장 비참하고 슬픈 병은 알츠하이머가 아닐까. 처음엔 단어를 그 다음엔 문장을, 그 다음엔 사람들을.. 그렇게 잊어간다. 적극적으로 과거가 되는 사람들에게 추억은 없어져서는 안되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그렇기때문에 미자의 상황은 삶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한 알레고리를 묻는 필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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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그렇게 자기 자신도 돌보기 힘든 상황에서 자식의 아들인 손주를 돌본다. 그리고 그 자식은 미자를 딱히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딸은 영화 내내 등장하지 않고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만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아들은 실수로 난 것 같으며 그 짐과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를 실용적인 측면에서, 대리모로서 인식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영화속에서 미자는 자기자신의 의미를 잃어가는 환자임과 동시에 타인에게서도 의미를 잃은 인물인것이다.


그런 미자에게 한 가지 처절한 사건이 터진다. 학교에서 손자의 무리가 성폭행한 여학생이 자살을 한것. 당사자의 부모님들과의 만남에서 미자는 그들의 언어행위에 동화되지 않기위해 스크린 너머의, 스크린 상에 그들이 모인 식당 밖으로 나가 창밖에 위치한다. 


그로부터 미자의 '시 쓰기'는 시작된다. 명사를 떠오르기도 힘든 와중에 미자는 적극적으로 시 강좌를 나가며, 사물을 골똘히 감상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태어난 후에 했었던 모습들이 아닐까. 순수함이라는 것. 그것은 미자가 시를 쓰며,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택한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다. 시를 쓰기 위한 관찰은 애써 참아온 자신의 삶이 비참하고 암담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성폭행으로 경찰에 끌려간 손자, 친구라곤 말하지만 뜸한 연락뿐인 딸, 갚아야 하는 돈, 악화되는 알츠하이머까지..


영화가 끝나며 미자가 쓴 시는 비로소 완성된다.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의 제목에 아네스는 동정성녀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하는데 사욕과 사념, 불순물이 끼지 않는 깨끗함 그 자체를 말한다. 나는 이 글의 시작에 버려져 있는 기분을, 나의 의미가 퇴색되어져 감을 말했다. 미자는 그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시를 쓴 것일까. 그리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자는 시를 읊조리며 어느샌가 필름밖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녀가 머물었던 장소들을 조용히 비추며 풍경사진을 보듯 장면들은 넘어간다. 미자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시를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영화의 시간을 완수한 채 끝날 뿐이다. 


그리하여 의미를 잃어가는 와중에 이 '시'가 생각났다. 의미를 적극적으로 형성해왔던 지난날들이 너무 우스워서, 애석해서, 권태로워서 그러한 감정들이 섞이며 나는 미자가 되었다. 


불가피한 삶을 살아가듯이 의미를 형성하는것, 곧 다시 미자를 만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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