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기도 한 너 너이기도 그

다와다 요코 <목욕탕>

by 빈빈

가끔 '나'라는 주체가

다른 어떤 이로써 느껴질 때가 종종 있곤 한다





나의 피부와 몸, 내 전반적인 것을 이루고 있는 외관에 대하여 나는 과거의 상태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변했다'라는 것에는 변함없이 동의한다.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익숙해지는 것도 있고 아직까지 어색하거나 불편한 것들 또한 많다.

19살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도착한 독일에서 다와다는 모든 것이 낯설지만 이 낯섦이야말로 새로운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인식의 틀로 작용하기도 한다. '언어'는 문명의 일부로서 한 인간에 종속되기보단 정복하는 역할을 하는데 우리의 생각, 행동을 지배하는데 아주 탁월한 지위를 가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부르는 살색, 흑인 등의 말이자 인식은 사실 확정된 언어를 점층적으로 내재해온 것이니 절대적이지 않은 사실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다와다는 말한다 '빛의 유희'일뿐이라는 것을. 그 외에도 크산더가 사진을 찍기 위해 동양인 메이크업을 한다던가, 오랜만에 마주한 어머니에게서 들은 아시아인 얼굴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주창한 '모국어를 완벽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이다.


누군가에게 나라는 존재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아들, 너, 선배, 규남, 당신 등등 이렇게 여러 조각이 나인 셈이다. 그렇듯 목욕탕에 나오는 다와다 또한 여러 분신의 존재로 발화된다. 비단 인형, 비늘은 가진 물고기, 통역사 등등. 탈주체를 통하여 자신의 겉과 이면을 본다는 것은 오히려 낯설게 하기를 통해 역설적으로 주체에 다가가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 인식체로서 나는 탐구의 대상이자 성찰의 매개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나로서 살아보겠다는 하나의 의지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인 셈이다. 그래서 다와다의 책은 항상 시작하기 전에 '3인칭 나'라는 작지만 커다란 서문의 시를 통해 일종의 기도를 한다. 나는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목욕탕에서 주는 정서와 감정들이 내가 요 근래 느끼는 생각들과 일치해서 다소 소름이 돋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또는 메마른 얼굴이 조금은 나아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마신 그 행위 후에 나 또한 화장실의 거울을 보는 것이 내 하루 속의 첫 번째 서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너무 많은 Schuppe들이 나를 서운하고 슬프게 한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Schuppe이라는 단어. 책에서는 통칭 비늘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비듬, 뼈의 일부를 지칭하는 인상골 등으로 책에서는 각질로도 표현이 된다. 부, 모발, 손톱 등의 몸에 기생하는 것이자 몸의 일부인 각질. 각질의 주요한 기능은 외상에 견딜 세포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다와다는 그런 각질을 벗겨내고 다시 새로운 비늘(각질)을 몸에 지니게 된다. 이런 행위조차 전자에서 언급한 자신을 생성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본의 설화, 때를 벗겨내는 자신, 물고기의 비늘 등을 언급하며 그 이미지를 점층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데 Schuppe란 살아있는 것이지만 경직되고 죽은 것이기도 한 이중적인 의미로, 소설 속에서 그녀 또한 삶과 죽음의 모습들을 얼마 안 되는 서사 안에서 초현실적으로 풀어나간다.

내가 너무 슬펐던 것은 이 책은 마치 죽음을 준비하는, 죽어있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나'와 같아서이다. 그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다와다는 '죽음 후의 이력서도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렇다. 계속 비슷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나로 점철된 주체를 떠나보내고 또 다른 나를 차곡차곡 만들 이유도 있는 것이다. 시작과 끝의 선상에서 우리는 계속 똑같은 존재는 아니니 말이다.


어쩌면 타지에서 발견한 나는 신비하지만 무력한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난 목수, 나에게 언어를 가르쳐주던 크산더가 나의 몸을 원하고, 나를 걱정하는 듯 하지만 그는 무자비하게 나를 영면의 세계에 가두기도 한다. '나는 투명한 관'에서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벽, 받아들여지지 않는 외국인으로 보일 수 있는 그저 그런 존재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통역 속에서 난처하고 수치스러웠고, 마치 내가 좋아하는 혀넙치처럼 호텔의 거대한 식탁에서 난도질당하기도 한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 그것은 나를 가두었던 인식의 틀인 언어로 발화됐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나의 혀를 빼앗겼다. 어쩌면 내가 죽음에게 바쳤던 혀로 나는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한의 변형을 가능케 하는 투명한 관인 나는 비늘새로 모든 현상을 낯설게, 한 치 앞이 아닌 뒤로 물러서서 모든 것들을 바라본다.

'세상 그 어디 못 갈 곳 없네, 못 볼 곳 없네, 못 들을 곳 없네'

비늘새.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비늘을 펼쳐 하늘을 날기도, 비늘을 접어 바다를 헤엄치기도. 어디든 갈 수 있는,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그런 류의 존재. 죽음이자 생인 것처럼 삶은 희극이자 비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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