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되도록 단순한

177일째, 무레아에서 라야테아까지 야간 항해

by 파나오

 어둠 속에서 배는 바람을 타고 6노트(시속 약 11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둥근 계기판의 바늘이 우측 하단의 120을 가리킨다. 시계에 빗대자면 12시 방향에 0, 6시 방향이 180인 계기판. 바늘이 왼쪽이나 오른쪽 아래를 향해 움직일수록 숫자가 올라간다. 배의 머리를 바라보며 조타석에 앉았을 때를 기준으로 바람이 배의 어느 지점에 와닿는지를 알려주는 계기판이다. 0은 정확히 선두에 바람이 오고, 180은 정확히 말미에서 바람이 온다는 뜻이다.

120을 가리키던 바늘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간다. 타륜을 쥔 손에 우현 방향으로 압력을 준다. 바늘은 한 박자 늦게, 조금씩 다시 상승한다. 엔진을 끄고 돛으로만 운항할 때는 바람과 돛, 조종타와 실제 운행 방향 사이에 약간씩의 시간 차이가 생긴다. 바람의 힘이 몇 가지 물질을 통해 전해지며 변형되는 데 걸리는 시간 차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찬 바람을 받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돛의 압력이 선체를 타고 물을 밀어내는 힘으로, 다시 그 물을 밀어내는 방향타를 타고 내 손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돛으로 배를 운전한다는 것은 이 모든 요소-바람과 물, 돛의 천, 배의 부피감, 조종키와 방향타의 저항-의 미묘한 조화를 감각하며 시시각각 조응하는 일이다. 물론 가장 큰 변수는, 바람이다.



 110을 넘어 100 이하로까지 바늘침이 옮겨간다. 이번에는 타륜을 강하게 좌현으로 틀어잡는다. 바람의 결이 달라지거나 때로 조류나 파도의 영향으로 계기판의 바늘은 요동칠 수 있다. 바람으로 인한 것일 때는 돛과 배 전체가 틀어질 수 있기에 단단히 방향을 고쳐 잡아야 하고, 파도가 출렁이며 계기침을 움직일 때의 요동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이 둘을 감지하기 위해 몸은 계속해서 피부에 와닿는 바람의 소리를, 선체를 어루만지는 파도의 소리를 듣는다. 계기판을 보며 듣고 또 듣는다. 계기침의 방향이 30도 이내 범위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게 조절하며 타륜을 잡는 행위가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동시에 다른 무언가와 병행할 수는 없는, 온몸의 감각을 낮은 강도로 지속해서 사용하는 작업이다. 생각하는 기능을 온통 마비시킬 만큼 단순한 작업. '바람이 저기서 오니까 이렇게, 선체가 저쪽으로 틀어졌으니까 저렇게' 하는 식으로 헤아리는 마음은 점차 잦아들고, 바람의 강도와 물살의 방향에 거의 즉각적일 만큼 손짓으로 반응한다. 아주 잠깐씩이지만 나와 배, 배와 바람이 온전하게 조율되는 순간들.



 온몸의 감각이 자연 원소들과 맞닿는 일에 늘 매료되어 왔다. 특히 그중에서도 물이 그랬다. 기억하는 한 언제나 수영을 좋아했고, 물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파도에 휩쓸려 눈이 새빨개지도록 시달려도 물을 그리워했다.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은 다르니까. 수영을 할 수 없을 때면 물가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곤 했다. 물은 언제나 같아 보여도 항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물속의 에너지와 공기 중의 요소들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의 아름다움을 항해를 하면서도 새삼 느낀다. 자연 요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매번 같아 보이는 자연 풍경이어도, 늘 변화하고 있다는 것. 알아차리는 이의 감지력에 따라 아주 작은 차이도 온 세상이 된다. 그걸 감지하는 사람에게 무한의 신비감을 안겨주는.



 타륜을 잡은 지 세 시간째, 동쪽 하늘이 붉어오기 시작한다. 조종석 오른쪽에는 선장인 록시가 헤드폰을 끼고 엎드린 채 쪽잠을 자고 있다. 긴 항해에서도 선장이 편히 잠드는 건 드문 일이다. 나와 그녀, 그리고 다른 크루인 크리스. 세 사람의 모든 삶이 지금 이 38피트짜리 카타마란 안에 들어있다. 까딱 무언가 잘못되면, 우리 셋의 모든 것이 북미 서부 해안과 호주 동부 해안 사이 한가운데쯤 되는 수심 수천 미터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나 같은 초보 조종사이건 록시처럼 단련된 선장이건, 맡은 짐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피로 속에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몸의 모든 에너지는 오직 항해에 필요한 만큼만 깨어있다. 바다 말고 다른 건 행동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 바다가 나를 살려두는 건지, 내가 바다를 살아가는 건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배에서 해먹는 식사, 라야테야의 숲

 록시와 나는 물속에서 만났고, 단숨에 서로를 알아봤다. 때로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말들보다 어떤 눈빛이 더 강렬하다. 나는 바다 사람만의 눈빛을 좋아한다. 제주에 삼 년을 살면서 땅이 아니라 바다, 물생활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어떤 빛깔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삼 년이 지나면서는 더 다채로운 바다와 함께하고 싶었다. 따스하고 맑은 열대 바다에서 여한 없이 잠수해 보길 꿈꾸기 시작했다. 어느 초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때마침 하던 일 하나를 정리하게 됐고, 드디어 고대하던 열대 바다 잠수 여행을 떠났다. 그 떠남이 이어지는 삶의 경로를 어떻게 바꾸게 될지 알지 못한 채. 그곳에서 록시를 비롯한 바다 부족들을 만나게 됐다. 바다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이나 삶의 기획, 심지어 자기 몸마저 내던지는 사람들. 통장 잔고가 3만 원 남을 때까지 바다를 좇는. 이들은 으레 땅에서 만나는 이들이 보내는 애정과 걱정이 교차하는 눈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게 된다. 바다가 아니더라도, 안전지대 너머를 모험하는 영혼들은 안다. 약간의 감사와 약간의 배신. 감사하지만 온전히 길들여질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럼에도 떠나게 될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기 때문에,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걸. 모험가들은 안다. 다정한 벗들을 경악케 할 여정을 떠날 때의 그 미안함은 실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두려움이 손짓하는 곳으로 떠나 본 이들은 안다.



 인간이 바다를 사랑하는 건 일종의 질병이라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유일한 치료제는 바다뿐이라는 망상도. 지금 너도 그렇다는 걸 아는, 그 눈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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