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일째, 여성 몸들과 프리다이빙
소피는 여자 다이버다. 아니, 실은 그에게 성별을 따로 물어본 일은 없기에 알 수 없다. 그냥 내가 그렇게 짐작했다. 소피는 키가 크고 팔과 다리가 길쭉길쭉하다. 머리는 짧게 유지한다. 고양이를 좋아한다. 말이 많다. 소피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다정하면서도 쉴 새 없는 유머에 버무려져 있다. 처음 S센터에서 한 다이빙에서 소피와 함께였다. 그럼에도 그날 거기서 곧바로 친해졌다기보다는, 소피에게 내가 다이빙이 늘지 않는다고 칭얼대면서 가까워진 것 같다. 그는 나의 ‘다이브 마마’를 자처하며 적극적으로 고민을 들어주고 코치도 해주었다. 특히나 마음에 와닿았던 말은 “나도 너하고 똑같이 느꼈었어”였다.
프리다이빙 강사들은 대회에 출전해 기록을 내는 선수 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 본인의 최대 수심을 갱신하는 훈련을 할 기회가 거의 없다. 프리다이빙 단체에서 인증하는 강사가 되기 위해서 중급 레벨까지 가르치는 초보 강사들은 보통 40미터, 마스터까지 가르치는 강사들은 50미터, 강사 트레이너는 그 이상의 수심까지 다녀와야 하는 기준이 있다. 소피는 나와 비슷하게 대회 출전이나 기록 경신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60미터까지는 잠수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55미터... 57미터... 58미터...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면서도 늘 최대 수심 60미터를 도전할 때만큼은 그 직전에서 주저했다고. 그랬더니 옆에 있던 그의 친구 M도 비슷한 경험을 나눠줬다. ‘나도 나도! 목표가 30미터였는데, 항상 28미터에서 돌아섰어. 잠수 기술보다도 어떤 심리적인 압박감을 극복하기가 정말 오래 걸렸어.’
사실 커다란 도전 직전에 긴장감과 공포감에 휩싸여 돌아서고 마는 이런 종류의 감정은 수년 동안 잠수를 해오면서 여러 여성 몸들에게 자주 보이던 현상이다. 여성이 아닌 다이버들에게도 물론 다양한 종류의 긴장감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유독 수치상으로 커다란 성취 앞에서 돌아서고 마는 일은 나를 포함한 여성 다이버들에게서 많았다. 물론 그들조차 종국에는 성취해내고 만 문턱이더라도. 여성들은 유달리 그 감정을 알아차리는 데 기민했거나, 그런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고 공감하는 데 특출났다. 나는 모든 여성들이 겪는 어떤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만난 '모험하는 여성'에 가까운 몸들이 때때로 무릎을 탁! 치며 공유하곤 했던, 여성이 아닌 몸들과는 결이 조금 달랐던 어떤 특수한 감각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고 자란 우리 대부분은 사회가 '위험한 스포츠'라고 규정하는 행위 앞에서 이중 구속을 경험한다. 전문 운동선수가 각고의 노력으로 분야 최정상급에 도달한, 몇몇의 예외 사례를 들여다보자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어린 여성들은 보호자로부터 '더 안전한' 영역에 머무르기를 교육받아 온 탓에, '안전함'의 사회적 기대를 넘어서는 경계 앞에서 움츠러들곤 한다. 물론 보호자나 교육자들은 자녀의 성별에 상관없이 위험한 행동에 격려와 보상보다는 처벌을 내리곤 하지만, 남아들에 대해서보다 여아들에 대해 그 처벌의 수위가 높은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평균적 상황일 것이다. 여아들은 남아들보다 약하고, 순하고, 착하고, 경계 안쪽에 머무를 때 더 자주 감정적 사회적 보상을 받는다. 물론 전반적인 사회 인식이 바뀌고 있다면 반가운 일이지만, 현재 성인 이상인 이들이 지나온 교육의 현실은 지금보다 뒤처졌던 것이 사실이니까. 내가 다녔던 남녀공학 중학교만 봐도,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을 새카맣게 메운 것은 남아들의 땀냄새와 흙먼지였다. 사춘기를 지나며 또래 문화로부터 '이상적인 여성성'을 학습한 이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 큰 틀을 어긋나기가 쉽지 않다. 따로 스스로를 재교육하고, 치유하며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경험을 갖지 않은 이상, '모험적인' 여성들은 언제나 내면의 학습된 부정적 기제의 구속을 경험하는 것이다.
나, 그리고 주변 지인들을 통한 직간접적인 경험과 인터넷 검색의 힘을 조금 빌어 설명하자면, 모험하고 운동하는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이중 구속은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여성 모험가들은 여느 모험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전적이고, 강인하고, 성공적이기를 기대받지만 동시에 너무 지나치게 경쟁적이거나 집착적이어선 안되고, 그렇게 되면 '독하다'거나 '고집스럽다'는 부정적인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더군다나 통상적으로 남성의 몸보다 신체적으로 약하다고 여겨지는 젠더 위계 상에서 '남성의 수행'을 넘어서는 여성의 몸이 된다는 것은 '여성다움 프로젝트'를 위협하는 일이다. 도전에 성공할 때 따르는 이중적 메시지의 경험. 이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라면 참 부럽고 다행인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다른 어려움이 따르겠지. 계속 그렇게 본인에게 닥친 특수한 어려움을 마주하며 나아가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위와 같은 이중 메시지 경험이 닮아있는 이들이 서로의 경험을 지지하면서 조력할 수 있다면? 그게 내가 몇몇 여성 몸들과 다이빙하며 느낀 연대의 감정이다. 단순하게 여성이라서가 아니다. 이들이 이 경험으로 인해 다른 누구보다 더 나은 코치나 다이버가 된다는 말도 아니다. 단지 서로의 특정한 감정을 깊이 공감해 줄 수 있는 버디/코치가 있다면, 그 연결의 소중함을 맘껏 탐닉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각 나라 대표로 참여해 잠수 깊이나 길이를 경신하는 대회 참가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도 다이빙을 즐기는 하나의 분야일 수 있겠지만, 내가 더 관심이 있는 건 수심과 상관없이 바다와 물에서 긴장과 두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잠수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심리적 치유다. 바다와 하나 되는 감각, 자신의 공포를 넘어서는 감각은 기록을 경신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 자신의 다이빙도 그렇지만, 내가 강사로서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경험도 '수치'를 기준으로 서로를 줄 세우는 위계 문화가 아니라 다이빙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비교불가능한 충만함이다.
내가 보홀에서 주로 이용한 S센터는 훈련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수시로 크고 작은 프리다이빙 대회도 자주 열리고, 내로라하는 다이빙 선수들이 장기간 훈련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온통 자기 기록 늘이기에 집중하며 크고 작은 부상도 수시로 겪는 경쟁적 다이버들 사이에서 '나만 다른 다이빙 경험'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소피와의 대화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소피도 대회식 다이빙, 기록 경쟁식 다이빙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했다. '누구와 다이빙을 하든,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다이빙을 하면 돼. 수치 늘리기에 관심이 없다면, 더 여유롭고 이완된 다이빙, 편안한 다이빙을 만들어가면 되는 거지.'
2024년 마지막 날, 소피에게 코칭을 받으며 다이빙을 했다. 우리는 내가 갈 수 있는 최고 수심을 늘리는 데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다이빙 직전 준비호흡부터 잠수 초반까지 어떻게 더 편안할 수 있을지에 집중했다. 소피는 내 입수가 너무 힘차고 다급하다고 했다. 나는 깊이까지 다녀올 생각에 서두르느라 초반 다이빙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잠수 전 준비시간 동안 아무리 온몸을 편히 이완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바닥 수심에 내가 갈 수 있을까'하는 모종의 긴장감이 남아있음을 알게 됐다. 해본 적 없는 것,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갈 때 몸 어딘가에 긴장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 긴장감은 '그럼에도 해낼 수 있다'라고 등을 떠밀어주는 코치와 함께할 때 넘어설 수 있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 긴장감은 당연하다'라고 수용해 주는 코치를 통해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나처럼 감정적으로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다이버에겐 나의 심리적 어려움을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이에게 더 깊은 신뢰가 느껴지는 법이다.
소피뿐 아니라 다이빙 계 곳곳에서 만난 빛과 같은 존재들이 있다. 자신의 다름을 '우열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나아가는 사람. 그 다름을 감추거나 눌러 없는 척하지 않는 이들이 주는 깊은 위안이 있다. 다이버로서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유영함으로써 소소하게 위안을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도전도 괜찮고 도전 앞에서 망설이는 머뭇거림도 괜찮다고. 성취 앞에 계속되는 실패, 그 실패가 가진 기나긴 여정을 무시하지 않는 모험가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