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일째, 10년 지기 친구랑 바다 다이빙(1)
"oo야, 나 혹시 너에게 가서 강습받아도 될까?"
진에게 메시지가 온 건 1월 하순이었다. 진은 남쪽 동네 사투리를 쓰는 사람인데, 나처럼 서울 쪽 말을 쓰는 이한테는 애써 서울식 말투를 비슷하게 써준다. 그런 그에게 나는 서툰 사투리를 쓰며 까불고, 천성이 상냥하고 의젓한 진이 어이없어하며 웃어 넘겨주는 식이다. 진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막 새로운 섬(까미긴)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다. 알던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 익숙한 얼굴이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찌나 콩닥콩닥 신이나던지. 게다가 우린 서로 안지 십 년이 넘은 관계지만 첫 일 년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시에 살아온 터라 몇 년에 한 번이나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황이었다. 나의 당연한 오케이 사인에 그는 호기롭게 필리핀으로 오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까미긴은 보홀 남동쪽 항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섬으로, 보홀보다는 민다나오에서 훨씬 가깝고 행정구역도 민다나오에 속해 있다. 보홀만큼이나 아름다운 해양환경을 지녔지만 관광 개발은 훨씬 덜 된 섬이다. 그만큼 온라인상에 한국어로 된 정보도 한참 적고, 언어가 다른 곳으로 하는 여행이 익숙지 않은 사람에겐 발길 닿기가 어려운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멀고 험한 곳까지 와준다는 내 친구 진에게 나는 숙소 정보, 센터 주소부터 가져오면 좋을 준비물, 날씨 안내까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소통했다. 그럼에도 도착 당일 진의 비행기는 까미긴이 아닌 그 옆 민다나오 섬에 착륙하고 마는데...
(도착 예정 시간이 되어 나눈 대화)
"도착했어? OO 가게 앞에서 만나자! 데리러 갈게"
"응. 이제 내려서 지금 짐 찾고 있어"
<항공권 사진을 보내며>
"나... 혹시 비행기 잘못 예약한 거야?"
"엥? 거기 배 타고 가야 되는 덴데.."
천만다행으로 민다나오에서 까미긴까지는 저녁까지 배가 자주 다닌다. 공항에서 울며 주저앉았다는 진은 끝내 여러 사람의 도움 덕에 같은 날 밤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이미 다저녁이 된 시각, 까미긴 번화가 앞에 멈추어 선 툭툭에서 내린 진은 축축하게 구겨진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와중에 단 하나, 얼굴만큼은 새하얗게 질린 사람처럼 동동 떠있어 어찌나 안쓰럽던지.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를 동네 제일의 맛집으로 데려갔다. 망고 스무디를 쪼르륵 마신 얼굴에 그제야 생기가 돋아나는 것 같다. 우리의 여정은 그렇게 우당탕탕 시작됐다.
진과 나는 서울에서 다닌 첫 전일제 직장에서 동료로 만났다. 인파가 많은 거리에서 환경단체 후원금을 모금하는 고된 일이었다. 어두운 시기였다. 우리는 일이 끝나면 같이 홍대에 있는 맥주집에 가서 스트레스를 수다로 풀고, 담배를 피웠다. 둘 다 자연환경을 사랑한다는 열정만큼은 뜨거웠지만, 함께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나? 숲이나, 하천에서 만난 적이 있던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도 나도, 마음과 몸을 건강히 돌보면서 그 일을 계속하긴 어려워진 탓에 얼마 못 가 그만두게 되었고, 상사에게 그만둔단 말을 하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은 난다.
비록 몸은 멀어졌으나 일 년에 두어 번, 연락을 주고받을 땐 언제나 서로의 마음 건강을 세밀히 살피는 관계였다고 느낀다. 진과 전화 통화를 하면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숨넘어가라 웃기도 하면서 전화기가 뜨거워질 때까지 붙잡고 있는다. 진은 아마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 중에서도 내 여러 모습을 가장 잘 아는, 어떤 면에서는 사촌이나 이모와 같은 먼 가족처럼 느껴지는 이다. (그건 진이 커다란 캐리어 안에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한식이며 비상약이며 온갖 지원물품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주고 간 자외선차단제가 하도 많아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그런 그가, 여러 세월을 지나, 서로 바삐 자기의 길을 가는 시간을 지나 이렇게 함께 바다를 누리는 날이 오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그동안 타지에서 분투하며 프리다이빙을 배우고, 직장을 구하고 집을 찾으며 적응하기 위해 애쓴 보람이 그가 온다는 것만으로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물론 야근과 과로에 시달리던 그에게도 아마 오랜만의 휴가가 나름의 의미를 가졌겠지만, 나로선 이 넓은 세상에서 굳이 굳이 '지금, 이곳의 나'를 골라 휴가를 보내기로 한 그의 결정이야말로 찬란한 선물이었다.
진이 바닷속을 유영하고, 나는 내가 만난 바다로 그를 부드럽게 이끌고. 쉬는 날이면 맛있는 것을 먹고, 웅장한 폭포수나 조용한 해변을 구경하러 가고. 이 섬에 오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일 뿐인데도 함께 보낸 시간이 긴 사람과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외지인'으로서의 생활을 한 계절 치르고야 더더욱 절절히 느낀다.
아직 우리 여정의 둘째 날로 넘어가기도 전에 이리도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면 나는 진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보다. 아니면 바다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걸 사랑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