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미술. 체육. 일상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이야기
오라클: 사탕 먹을래?
네오: 내가 먹을지 말지 이미 알고 있잖아.
오라클: 그걸 모른다면 오라클이 아니지.
네오: 이미 알고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거지?
오라클: 너의 선택은 이미 끝났어, 너는 여기 선택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선택을 왜 했는지 이해하려고 온 것이야.
영화 매트릭스의 오라클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라는 여정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가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단지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에 머무른다면, 그 길은 지극히 막막해질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던져야 할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태어난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것인가다. 단순히 이유를 찾는 대신, 삶을 기쁨과 안도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라벨이나 타이틀에 매달리지 않고도 말이다.
학창 시절에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목표가 내 모든 선택을 좌우할 것 같았다. 막상 대학에 가니 ‘첫 직장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또 다른 문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취업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건 배우자 선택’이라는 결혼이라는 관문, 그다음엔 ‘자식 농사’라는 이름의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게 인생의 문턱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 보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 문들은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강철처럼 느껴지던 문들은 사실 처음부터 열려 있었고, 다만 내가 손을 뻗어 열지 않았을 뿐이었다. 삶의 선택은 그렇게, 문을 여는 간단한 행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문 너머로 무엇이 기다릴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한 발 내디뎠을 때 삶은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흔을 앞둔 지금,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니 살아가는 큰 궤적은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속에 담긴 인생의 만족도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개인에게 주어진 과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긴장감을 내려놓고 몰입할 수 있는 좋아하는 것들의 합이었다. 좋아하는 것들 속에서 얻는 다행과 안도감이 나를 지켜주었고, 그 순간들이 내 삶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어쩌면 모두가 당도하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 나의 삶을 어떻게 더 가치 있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며, 일상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것들을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를 건강하게 만들고 내 영혼을 살 찌운 순간들을 엮어보고자 한다. 내가 잘 살았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한 작은 씨앗들을 소개하려 한다. 나를 살찌우고 성장하게 한 것들은 음악, 미술, 그리고 체육, 즉 음. 미. 체. 였다. 주변을 둘러싼 지식과 정보, 빠르게 변하는 기술들이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지만, 삶을 관조하고 내면을 채우는 힘은 이 음. 미. 체. 에서 비롯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했고, 소실점을 멀리 둔 채로 나아갈 용기를 주었다.
음악은 내게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특히 클래식은 오랜 세월 인간의 내면을 비추며 이어져 온, 재정의가 필요한 예술이다. 이 책에서는 내가 사랑했던 곡들과 함께 Pop, Rock, K-pop 같은 대중음악의 매력도 소개할 것이다. 미술 역시 유럽 중심으로 꽃 피운 고전적 사조에서부터 현대미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의 여정을 통해 독자와 함께 감상하고자 한다. 또한, 스포츠와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과 경험들을 나누며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독자와 나, 서로의 경험을 잇고 공감할 수 있는 대화가 되기를 바란다.
2024년 노벨문학상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다. AI가 물리학과 화학의 영역에서 혁신을 이끌었지만, 문학은 여전히 인간 내면의 사유와 감정을 담는 고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건반 위의 멜로디, 캔버스의 색감, 종이 위의 단어는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이 녹아 있는 흔적이다. 나는 음악, 미술, 체육이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인간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영역임을 확신한다. 라움아트센터에서 들었던 실내악의 잔잔한 선율, 덕수궁 석조전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감동적인 감상, 그리고 도심 속 미술관에서 만난 캔버스 위의 색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낸 관계성의 메시지, 바닷속에서 경험하는 우주의 신비로움까지.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가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더 깊이 이해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통찰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는 묻고 싶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이런 ‘인생 순간‘이 있는가? 삶의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회복과 에너지로 채워지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순간들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의 가치를 탐구하는 이야기다. 40년을 살아온 나는 매일이, 내가 사는 이 서울이 새롭다. 마치 내가 여전히 여행을 떠나 있는 듯한 기분을 준다. 일상의 맥락이 변하면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내 삶에 들일 것인가? 이 책을 펼친 독자도, 기대감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