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진심을 담아서

해수가 만난 사람 2 - 성악가 황현한

by 파도


햇살이 포근한 봄날, 방배동의 작은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성악가라면 으레 크고 당당한 풍채, 번들거리는 무대의 공기를 떠올렸던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훤칠했지만 소년 같은 인상, 살짝 수줍은 미소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한마디에 어깨에 들어있던 힘이 스르르 빠졌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내 노트에는 스펙보다 태도가 먼저 적혔다. 그는 성취를 말할 때 “배운 게 많았다”는 말로 정리했다. 서울대 성악과(11-15)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 국립음대와 프라이부르크에서 석사·박사 과정을 밟으며 유럽 극장 무대에 섰던 시간들. 동양인 성악가로서 늘 두 배를 준비해야 했다는 사실을 담담히 들려주면서도, 그 시간 덕분에 지금 제자들을 더 잘 이끌 수 있다고 했다. “레슨이 너무 즐거워요. 학생들과 있으면 시간이 훅 가요.” 말끝에 스며 있는 감사가 오래 남았다.

그의 또 다른 무대는 유튜브다. 채널 이름은 H CLASSIC, 구독자 4만. 장비는 소박하고 편집은 혼자 한다. 시작은 코로나 시기였다. 독일에서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던 날, 자가격리 방 안에서 그는 녹음기를 꺼냈다. “그동안 못 불러본 노래들, 한번 불러보자.” 혼자 노는 마음으로 올린 영상에 “위로가 됐다”는 댓글이 달렸고, 그때부터 노래는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유튜브는 제 일기장이에요. 꾸준히, 진심을 담아 남기는 기록이죠. 자극적인 편집 없이 담담하게요.”

채널의 노래들은 벽이 낮다. 오페라와 가곡이 중심이지만, 김광석·양희은·이문세의 노래도 자연스레 올라온다. 늘 흥얼거리던 곡들이 영상이 된 것이다. 찬송가도 그렇다. 종교적 목적보다 그저 입에 붙은 노래를 불렀는데, 듣는 사람들이 “큰 은혜가 됐다”고 말해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클래식이 낯선 이들도 그의 노래 앞에서는 망설임이 덜하다.

가장 사랑받은 영상은 쾰른의 눈 내리던 아침에 부른 가곡 ‘눈’. 쾰른은 눈이 드문 도시다. 어느 날 커튼을 여니 창밖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녹음기를 꺼내 노래했다. 그 즉흥의 장면이 115만 회가 넘는 재생으로 이어졌다. “이 노래 듣고 성악을 처음 알게 됐다”는 댓글이 달릴 때마다, 그날의 창밖이 다시 떠오른다고. 내겐 그 영상이 그의 채널 정체성을 단단히 잡아준 출발점처럼 들렸다.

그의 길에는 방송의 기록도 있다. ROTC 복무를 마치고 유학을 준비하던 때 ‘팬텀싱어’ 출연 제안을 받았다.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방송을 본 사람들이 그를 찾아 채널로 들어왔다. 크로스오버라는 시도에도 마음이 열리던 시기였고, 그 경험은 지금의 유연한 레퍼토리를 만들었다. 실패의 언저리에서 새 길을 얻는 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장 조용하게 내 마음을 흔든 건 한 팬의 이야기였다. 성악을 전공했지만 암과 싸우던 분이 그의 독일 영상을 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고, 이후 공연에도 꾸준히 와 준다고. 그는 “제가 더 큰 선물을 받은 거죠”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성악이 누군가의 삶을 붙드는 끈이 된다는 사실이 눈앞에서 선명해졌다. 음악은 무대의 조명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밝아진다.

이제 그는 귀국해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예술고와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독창회와 초청 연주의 무대도 계속 밟는다.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아이들이 조금 덜 겪으면 좋겠어요. 제가 돌아온 길이 누군가에겐 지름길이 되면 좋겠고요.” 그 말을 듣는데, 교사와 가수 사이에 선 한 사람의 직업 윤리가 느껴졌다.

우리는 한참을 음악 아닌 이야기를 했다. 감사, 배려, 연결. “한 명이라도 더 들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한 이유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배려를 다른 이에게 건네고 싶다고 했다. 능력과 실력을 과시의 칼로 쓰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을 덮는 담요로 쓰는 사람. 카페 창으로 들어오던 봄빛처럼, 말들이 따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의 채널을 다시 열었다. 소박한 화면, 과한 효과 하나 없는 편집, 숨을 고르고 시작되는 첫 소절. 클래식이 낯설어도 괜찮다. 가곡 ‘눈’, 익숙한 찬송가, 때때로 흘러나오는 김광석과 양희은. 어떤 곡이든 그의 목소리는 먼저 마음을 다독인다. 성악을 “배워야” 듣는 음악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도 충분히 “틀어둘 수 있는” 음악이라는 걸 알게 된다.

황현한. 내 노트의 마지막 줄엔 이렇게 적었다.
꾸준히, 진심.
그 두 단어가 그의 음악을 밀고, 그의 삶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든 전염된다. 오늘, 당신의 하루에 작은 여백이 있다면 그의 노래 한 곡을 들어보길.

쾰른의 눈이 내리던 아침을 배경으로 부른 ‘눈’부터 시작해도 좋다. 낯설던 성악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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