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가 만난 사람 3 - 6.25참전용사 신동소 교수
문래동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바람이 찬 데다, 고층 빌딩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희미했다.
오래된 외벽은 빛이 조금 바래 있었고, 복도에는 어딘가 오래된 집 특유의 냄새가 은근히 남아 있다.
13층에 내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금세 열렸다. 신동소 교수(임학53)가 서 있었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 백발의 머리, 종이처럼 희고 고운 피부에 세월의 흔적인 검버섯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놀랄 만큼 맑다.
눈빛이 내 시선을 잡아끄는 순간, 나는 그가 단지 ‘나이 든 어르신’이 아니라, 뭔가를 평생 꿰뚫고 살아온 사람임을 직감했다.
“집이 누추해서 그런데, 근처 카페로 가는 게 어떨까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동시에 손끝과 팔이 가볍게, 그러나 일정한 간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순간, 머릿속에 짧은 계산이 스쳤다.
이 추운 날, 카페까지 걸어가는 길이 혹시 위험하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을 드러내긴 싫었다.
“교수님이 편하신 곳이 제가 편한 곳입니다.”
내 대답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웃었다.
“서재가 좀 정신없고, 아픈 아내가 있어 민망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미소로 답했다. “그럼요. 더 좋습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편에 서재가 있었다.
한 걸음만 옮기면 닿는 거리였는데, 실내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레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아까 카페로 가자는 제안을 그대로 따랐다면 위험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문틈 사이로 벽을 빽빽하게 채운 액자들이 보인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표창장과 감사패, 오래된 사진들이 층층이 걸려 있다.
색이 바랜 사진 속의 사람들, 어느 신문 기사에서 오려낸 활자,
서울대 동문회보에 실린 기고문이 빛을 받아 유리 액자 안에서 은근히 반짝였다.
방 안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책장과 서랍은 마치 숨이 찬 듯 조금 벌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가 최근 자비로 출간한 책 '충렬탑에 이르는 길'이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묵직한 회색빛에 군모와 무궁화가 인쇄돼 있었고, 모서리는 이미 손때가 살짝 묻어 있었다.
그는 책 위에 손을 얹더니, 마치 오래된 친구의 어깨를 다독이는 듯한 동작으로 천천히 표지를 쓸었다.
“17년 동안 써온 글과 기록을 모았습니다. 전국 대학에 충렬탑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교도 반드시 동참해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17년’ 속에는,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기념사업회에 제안서를 내고, 번번이 거절당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여정을 자비를 들여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책의 감수는 큰아들이, 표지 디자인은 손녀가 맡았다. 세월이 만든 기록이 다시 가족의 손길을 거쳐 세상으로 나왔다.
2008년, 국가유공자로 공식 인정받은 해부터 그는 매년 한 편 이상, 서울대 재학 중 전쟁에 나가 숨진 46명의 학도병을 기리는 글을 써왔다.
크고 작은 신문, 잡지, 명예교수 회보, 작은 동문 소식지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 글들은 누군가의 눈에는 ‘옛사람의 집념’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단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모교에 충렬탑을 세우는 것. 그는 그 여정을 자비를 들여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서울대 재학 중 전쟁에 나가 숨진 동문이 46명입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나는 살아 돌아왔지만, 그분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우리 학교에 충렬탑이 세워진다면,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잠시 흔들렸다. 말끝이 흐려지자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해졌다.
그는 눈길을 책상 한 곳에 고정한 채, 손끝으로 표지를 두어 번 더 쓸었다.
“전쟁은 끝난 게 아닙니다. 지금도 휴전입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전쟁을 모릅니다. 역사를 증언할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완공을 꼭 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의 책을 이미 읽고 왔기에, 초반의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활자로 읽던 사건들이, 그의 목소리와 표정, 숨소리, 손동작 속에서 살아났다.
1950년,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열일곱 살, 중학교 4학년이었다.
학교장이 학도병 동원을 발표하자, 그는 자진해서 입대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대문을 나섰죠.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묘향산 자락에서 그는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밤새 개울에 엎드려 숨었고, 달구지 기사가 그를 실어 마을로 내려줬다.
어렵게 부산까지 이송됐지만, 병원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사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군 명단이 유실되어 복귀 명령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대학원 시절이 되어서야 다시 소집됐다.
부상받은 몸으로 참전 사실을 증명하고, 훈련병으로 재입대 후 제대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참전 기록은 남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참전 용사 관련 국가 사업이 시작되었고, 그제야 그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전쟁에서만 역사의식을 얻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산림과학부 교수로 수십 년을 보내며,
한 알의 씨앗이 거목이 되고 숲을 이루듯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국가 안보와 역사를 지키는 건 한 나라 국민의 의무입니다.”
그는 책에 인용한 구절을 꺼내 읽듯 말했다.
“배움은 반드시 넓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쓸모가 있어야 하며, 벼슬은 높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한다.”
책장 위에는 빛이 바랜 책들과 묵직한 원고 뭉치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오래된 종이에서 가볍게 먼지가 일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1950년의 한국을 살아낸 한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책과 기록으로만 접해온 전쟁의 참상을,
그것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의 숨결과 방 안의 공기 속에서 느낀 건 전혀 달랐다.
참전 시 소년들이었던 용사들이 이제 아흔이 넘었다. 정정한 목소리를 가진 참전자들을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려울 것이다.
첫 인터뷰에서 이런 인물을 만났다는 건 내게 큰 의미였다.
나는 한동안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 제창조차도 오글거려 했다.
보여주기식 애국심과 위선, 그리고 역사 속 친일 행적이 드러난 ‘애국지사’들의 이중성, 이른바 '국뽕'에 보수주의자들 때문이었다.
그날, 깨달았다. 지금 서 있는 이 땅은, 나보다 앞서 몸을 던지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혼 위에 있다는 것을. 교수님의 서재를 나서며, 묵직한 돌을 가슴에 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돌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신문이 나간 뒤에도 교수님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충렬탑에 대한 그의 염원이 향하는 곳을 생각할수록,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