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과 설화의 잔향 ― 정보라 『저주토끼』

by 파도


어릴 적 우리는 다양한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홍콩할매귀신, 팔을 치켜들고 통통 뛰던 중국 강시, 화장실 칸에서 들리던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같은 괴담들.

이야기는 유치했지만 아이들의 밤을 사로잡기엔 충분히 섬뜩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수많은 구전 괴담과 전래 설화,

명작 동화, 고전 문학 속 서사를 뒤섞어 들으며 자라난 존재일 것이다.

이야기는 우리 몸속 층층이 쌓여, 때로는 꿈이 되어 배어나오곤 한다.


투명한 비커에 흩뿌린 색 잉크처럼 여러 서사들이 섞여 이상한 풍경을 만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그것이 무슨 색이었는지는 금세 흐려진다.

『저주토끼』를 읽는 경험도 그처럼 내 안의 오래된 이야기들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억울하게 파산하고, 그 복수를 위해 만든 토끼 모양 램프가 차마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예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속에 숨긴 것은 오로지 저주의 기능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사회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폭력과 분노를 포장하는지를 생각했다.

이 작품은 화려한 램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아름다운 저주의 구조’에 대한 은유처럼 보였다.


〈머리〉에서는 변기 속에서 자꾸 솟아오르는 머리가 등장한다.

그것은 죽은 여자의 잔해인지, 억눌린 기억인지,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것이 ‘계속 솟아오른다’는 사실이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억눌러도 되살아나는 트라우마,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다급하게 끓어오르는 두려움이 바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차가운 손가락〉은 시각을 잃은 인물이 소리를 더듬으며 공포에 맞닥뜨린다.

소설은 시각적 묘사를 최소화하고 촉각과 청각을 강조하는데,

독자는 그 감각을 따라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다.

나는 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단순히 인물의 설정이 아니라,

불확실한 현실에서 언제든 겪는 보편적 은유처럼 느껴졌다.


〈안녕, 내 사랑〉에서는 화자가 사랑했던 세 로봇이 결국 그를 죽인다.

인간과 기계의 애정 서사는 따뜻하거나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다. 애정이 파괴로 전환되는 이 아이러니는

『천 개의 파랑』 같은 작품(로봇과의 우정)을 정반대로 뒤집은 스릴러 버전처럼 다가왔다.


〈몸하다〉는 가장 노골적이고 잔혹하다.

피임약을 먹은 여성이 임신을 하고,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헤매는 여정 끝에 낳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피 한 덩어리였다.

여성의 몸과 임신, 출산의 문제가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불쾌하게 그려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씌워진 불안과 모순의 무게를 굳이 ‘괴물’처럼 드러낸 것은 아닐까.

피임약으로 임신을 하는 설정도, 아버지를 찾는 여정도 불편해서 오래 잡고 있기가 힘들었지만,

기괴해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덫〉에서는 황금빛 피를 흘리는 여우가 등장한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불행을 부르는 피.

신화적 동물 같은 설정이지만, 결국 그 피를 좇는 인간들의 탐욕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환상적 소재로 싸인 욕망의 민낯을 드러낸 셈이다.


〈흉터〉는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강렬했다.

주인공은 온몸에 삼각형 흉터가 나 있고, 그 사이사이로 회색 비늘 같은 것이 솟아오른다.

그는 투견처럼 사람들의 판돈을 위해 내몰리고, 괴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그 역시 어릴 적 제물로 바쳐졌던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결국 괴물과 맞서 싸우고 복수를 선택한다.

하지만 결과는 구원이 아니라 폐허였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괴물은 본래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라는 질문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단편은 내 신체적 공포를 직접 자극했다.

주인공의 몸에 새겨진 120개의 삼각형 자국을 상상하자,

나는 내게 있는 환공포증(trypophobia)덕에 꾸준히 소름이 돋았다.

반복된 구멍과 무늬가 빽빽히 모인 이미지를 떠올땐 항상 몸이 불편해지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 점을 건드리며 단순히 ‘기괴하다’를 넘어선 강렬한 감각적 혐오를 일으켰다.



다른 독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할까?

나처럼 육체적 공포와 불쾌감을 느낀 사람도 있을테고, 또 어떤 이는 사회가 약자를 괴물로 규정하는 은유적 힘에 집중했을 수도.


독자마다 전혀 다른 결을 남길 책이라는 점이 분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해외 독자들은 이 불편함을 오히려 작품의 힘으로 읽어냈다는 사실이다.

『저주토끼』는 2022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Shortlist)**에 올랐는데,


심사위원단은 바로 이런 기괴함과 사회비판적 상상력의 결합을 “한국 문학의 새로운 확장”으로 보았다.




한국의 괴담·설화적 전통을 현대 사회의 폭력과 차별,

욕망에 접속시켜 낯설고 불편한 서사로 변형한 점이 높게 평가된 것이다.

나에겐 환공포증을 자극하는 괴기적 형상이었던 장면이,

그들에게는 국제 문학 무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학적 실험으로 읽히기도 했다.

문학은 언제나 읽는 이의 배경과 감각 속에서 다르게 발현된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즐거운 나의 집〉은 가정과 집의 서사가 어떻게 무너져내릴 수 있는지를 가장 날것으로 보여줬다.

영끌모은 건물 매매, 빚, 외도, 연쇄적인 죽음, 그리고 지하실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화자.

오히려 이 작품은 기괴한 상상보다도 현실의 부조리가 더 잔혹하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저주받은 왕자와 그 저주를 풀려는 공주의 여정이다.

전형적인 설화의 형식을 따르지만, 결말은 저주가 풀린 후의 배신과 파국으로 끝난다.

구원조차 허락되지 않는 서사, 허무 속에서만 정리되는 이야기의 힘이 있었다.


마지막 〈재회〉에 이르면, 강렬한 괴기 대신 담담한 목소리가 남는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의 기억, 묶여야만 안전하다는 역설,

행복은 아주 조금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

강렬했던 앞선 단편들이 드리운 긴장이 이 이야기에서 가라앉아, 쓸쓸한 울림을 남긴다.


책을 덮고 난 뒤, 내게 남은 건 커다란 위안도, 드라마틱한 감동도 아니었다.

다만 “작가가 어떤 길을 걸어 이런 기괴한 서사를 개척했을까” 하는 궁금증과,

한국 문학의 외연에서 이런 장르적 실험이 가능하다는 흥미였다.

우리 모두가 수많은 이야기 조각들의 중첩 속에서 살아온 존재라면,

『저주토끼』는 그러한 집적을 기괴하게 비틀어 낯설게 드러낸 결과물일 것이다.

내 안의 감동의 울림통을 를 크게 흔들진 않았지만,

“이런 문학도 가능하구나” 가 내 일기장에 또 하나의 작은 점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낯섦이, 이 책의 문학적 의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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