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게 살아야 할 이유
머리가 띵하다. 전화를 너무 많이 받았다. 연말 연초는 좀 느슨하게 가야 제맛인데 일이 많이 꼬였다. 결국 가장 문제는 윗대가리들의 '체면' 치례다.
12월 20일 무렵, 갑자기 콘서트 티켓 판매 업무를 맡게 됐다. 내 이름이 박힌 공문이 온갖 기업 홍보팀에 다 뿌려졌다. 그때부터 전화에 시달리게 됐다. "안녕하세요, XX 홍보팀인데요, XXX부장님이 권유하신 XXX 콘서트 티켓..." "아, 네. 어디라고 하셨죠? 성함 말씀해 주시고요, 협찬 금액 얼마에 티켓 몇 매.."
그도 그럴 것이 콘서트 티켓을 팔면 기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고 했단다. 기자들은 옳다쿠나 하고 '어차피 결탁된 관계'인 기업 홍보팀에 아쉬운 소리 한마디 했겠지. 협찬금이 크지도 않고 실물 티켓이 있고 언론사와의 관계도 있어서 기업들도 오케이 했겠지. 문제는 기자들이 "그거 잘 챙겨주세요"라고 말하면, 그 시다바리 짓은 우리가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많아봤자 2~30개 정도일 줄 알고 혼자 응대를 시작했는데 50개, 60개가 넘어가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우리나라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회사가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제일 헷갈리는 건 자산운용, 금융지주 같이 뭔가 그럴듯한 명사가 붙은 기업들이다.
한 열흘 정도, 심지어 연말 부산 휴가 기간을 포함해 1월 1일 아침까지 전화에 시달리다 보니 극심한 스트레스는 내 몫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보장된 인센티브가 1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화란 전화는 다 받아야 하고 온갖 CS까지 다 처리하다 보니 모든 것이 비관적으로 보일 수밖에. 기자들은 그렇게 인센티브 받은 돈으로 집 대출금 갚고 자식을 학비 대고 떵떵 거리며 중산층처럼 살아가겠지. 마치 자기들이 잘났고 거기에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리고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티켓 구매 명단을 보내주는데 가만 보면 다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다 자기 거 잘 챙겨달라고 한다. 회사 내에서도 연락 오는 창구가 하나도 아니다. 광고국 선배들은 돌아가면서 나한테 전화를 한다. 정신없고 빡쳐 죽겠는데 다 나보다 직급도 높은 사람들이라 뭐라 말도 못 한다.
이런 거 도움을 받아야 할 옆자리 대리는 육아휴직 들어갔다. 팀에 팀장 1명, 과장 1명만 있는 것도 문제다. 티켓을 받아야 하는 업체들은 다 지 사정만 이야기한다. "티켓이 아직 안 와서.." "오늘까지 퀵으로 받아야 해요" "사장님이 가시는 거라 신경 써주셔야 해요" "이거 자리 다 붙어서 왔는데 띄어서 해주세요" "오늘 오전 중으로 행사장으로 퀵 보내주실 수 있나요? 주소는.."
나의 우주가 모든 정신을 이 '명단'에 집중하고 있어도 놓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래서 오늘은 항의까지 받았다. 내가 남의 회사 상무한테 혼나기까지 해야 하는 건가. 그 사람이 항의하는 것도 이해는 가는 부분이라 일단 죄송하다는 텍스트를 보냈지만, 어찌 보면 내 잘못은 없다. 나는 분명히 명단을 이미 넘겼고 업체에서 국가애도기간으로 인해 콘서트를 하니 마니 재느라 티켓 배송을 안 한 거니까.
오늘의 나는 친절했지만, 앞으로의 나는 친절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의 미래일지도 모르는 일반직 선배들은 지나치게 친절하다. 서비스적인 마인드로 기자들을 대하는 것이 언론사에서 일반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들을 보면 나의 미래가 하나도 기대되지 않는다. 나도 언젠가는 같이 입사한 기자 동기들을 부장님으로 모시는 하나의 시다바리가 되어있겠지.
일 욕심 있었다면, 성공하고자 했다면, 진작에 유리천장 있는 여기를 떴을 거다. 모든 것은 12년째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 잘못이다. 종편 방송국에서 인턴 기자를 하며 언론인을 꿈꿨던 내가 '미디어경영' 직군으로 입사해 회사생활을 기대하던 때도 분명히 있었다. 입사 후 몇 년 사이 똑똑한 동기들은 "미디어경영이 이런 거냐"라고 말하며 하나둘씩 회사를 빠져나갔다. 어찌 보면 그들이 현명했다.
올해 부서가 개편되면서 나는 '혁신팀'이 됐다. 자부심을 가지랜다. 웃기네. 어차피 기자들 시다바리일텐데 이런 곳에서 무슨 혁신을 찾아. 시다바리도 하면서 자부심과 고고함도 지키라는 것인가. 아니면 기자들 시다바리 하는 업무를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는 것인가.
더 이상 친절하거나 굽신거리지 않으려고 한다. 올해 마흔셋이 됐으니, 싸가지 없게 살고 마흔넷쯤 잘려서 실업급여 좀 받다가 다른 일 하지 뭐. "싸가지 없게 살자" 올해의 다짐 하나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