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과잉 부여_인연 편(編)
50세 마지막 날, 침대에 실려 차가운 금속문 너머 심혈관 조영실(Cath Lab)로 들어갔다.
그리고 ICU(집중치료실)에서 만 51세 첫날이자 인도의 봄을 알리는 색의 축제 Holi, 정월 대보름, 개기월식을 맞았다. 이 상황이 너무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연일까? 하필이면 일까? 모종의 계시일까? 와 같은...
그저 흔하디 흔한 스텐트 시술을 한 것뿐인데 마치 새 생명을 부여받은 양, 인도에서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아마도 온갖 걱정에 대한 자기 방어 시스템이 발동해 나의 온 뉴런 세포가 긍정적 의미를 과잉부여하도록 시냅스 연결회로를 짠 것 같았다.
종교가 생활인 인도에 있어서인지, 불교의 연기사상(緣起思想)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 얼핏 고등학교 도덕시간에 배운 알 듯 모를 듯 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알 것 같았다.
좋은 인연일지 악연일지는 나의 마음속에
작년 11월 처음으로 아파트에 딸려있는 헬스장에 갔을 때 20대 무슬림 트레이너가 다가와 PT를 권했다. 회사 근처 짐에 비하면 비싼 편이었지만 한국에 비하면 십 분의 일 정도로 저렴했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운동 말고는 딱히 할 것이 없는 뭄바이의 삶이라 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역시나 한 달쯤 지나자 필리핀 근무시절 운전기사처럼 가불을 요구했고 막상 돈을 받고 나면 아프다고 종종 결석을 하는 트레이너였다.
개도국에 처음 주재원을 하게 되면 운전기사 혹은 가사도우미의 가불 요청에 속을 끓이는 일을 겪게 된다. 큰돈이 아니라서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뭣해 돈을 꿔주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 결국엔 호구가 된 기분이 들어 갈등이 커져 악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쌓이고 나니, 그리고 현지인 고용주는 어떻게 하는지를 보고 나니 깨달음이 왔다. 고용 관계는 단순한 금전 계약이 아니라는 것. 내가 고용하는 사람이 가불을 요청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미리 어려움을 살펴 주는 것이 고용주의 덕(德)이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게, 그들을 어렵지 않게 하는 게, 의지할 곳 없는 남의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이방인의 삶이 안전하고 풍요로워지는 길이었다.
2월 18일 라마단이 시작되었다. 무슬림에게는 금식과 기도, 나눔이 가득한 영적 축제의 기간이자 일 년 중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시기가 도래했다. 일주일 후 역시나 장문의 왓츠앱 문자가 왔다. 부끄럽지만 너무 어려우니 이번만 반달 치라도 가불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직 20 세션 정도가 남아있어 가불을 해준 들 채무관계만 더욱 길어질 뿐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었다. 냉정하게 거절을 할까... 이제 그만 해고를 해야 하나...
하필이면 가불 요청 문자가 온 날 CT검사를 하였다. 이 친구 덕에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었고,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버피 테스트와 런지 운동을 한 덕에 협심증 증세를 의심하게 되었다. 보통의 경우 심근경색이라는 응급 상황을 맞이해야 비로소 혈관이 막혔던 것을 알게 되는데, 난 이 친구 덕에 몸에 무리가 오기 전에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트레이너를 통해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인도 무슬림의 사회적 차별과 애환, 인도 청년들의 관심사 등등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라마단이란 영적인 시기, 내일 나올 CT검사 결과... 이 모든 상황과 조건이 트레이너가 악연이 아닌 은인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다음날 CT 검사 결과를 받으러 병원으로 나서는 길에 트레이너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대강 이런 내용으로. "운동을 같이 하는 관계는 서로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가불을 또 하면 서로 관계만 불편해질 뿐이니 그러고 싶지 않다. 시술 후 재활 운동이 필요할 텐데 편한 마음으로 같이 하고 싶다. 당신이 부탁한 돈은 가불이 아니라 라마단을 위한 당신과 당신 가족에 보내는 선물이다. 그리고 나의 건강을 신께 기도해 달라."
고작 10만 원 정도 돈이었다. 뭄바이 서민 청년에겐 한 달 급여의 삼분의 일 정도이긴 하다만, 심근경색을 막아준 값 치고는 정말 약소한 돈이었다. 이 돈으로 난 트레이너의 마음을 샀고, 시술에 대한 심적 부적도 샀다. 힌두의 나라 병원 로비에는 비슈누의 화신(아바타)이자,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해준다는 검은 얼굴의 발라지(Balaji)가 지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세계 3대 종교의 신인 알라에 매일 기도해 줄 친구도 생겼으니 불안한 마음은 줄어들고 마음의 평화가 스며드는 듯했다.
CT 검사결과가 나왔다. 예상한 것과 달리 위험한 부분이 많이 협착이 되었다. 영국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노령의 인도인 심장전문의는 아스피린, 항혈소판제, 긴급 시 필요한 혈관확장제 등등을 처방해 주며 빠른 시일 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한국행을 권하였다. 이런... 내일 방콕에 가야 하는데... 인도에서 구할 수 없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주문해 두었는데... 일단 다녀와서 한국에 진찰받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 예약을 할 겸 한국에 있는 의사에게 연락을 했다. CT 검사지와 진단서를 카톡으로 보냈다.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지금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 것은 아주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내는 기압이 낮아 산소 농도가 고산지대처럼 낮기때문에 치명적인 상황이 올 수 있고, 심근 경색이 왔을 때 골든타임은 5시간인데, 인도에서 한국행 비행기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비행이니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스텐트 시술은 어느 나라나 많이 하는 시술이니 인도에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부랴 부랴 방콕행 비행기를 연기하고, 호텔과 주문해 둔 소고기 돼지고기를 취소했다. 병원에 조금만 늦게 왔어도 아무것도 모른 채 방콕행 비행기에서 큰일을 당할 수 있었을 텐데... 가슴을 쓸어내리며, 새삼 트레이너가 고마웠다.
때마침 답장이 왔다. 감사의 마음과 나의 건강에 대한 염려, 신께 기도를 하겠다는 약속이 진솔하게 써있었다. 가불과 결석으로 해고까지 생각했던 사람인데, 이런 상황들이 그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마음을 만들었다.
원효대사 해골물과 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렇다. 인연, 악연, 호연... 다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받은 상대와의 관계는 이전과는 같지 않다.
※ 오늘의 인도 잡식
인도 남부 안드라프라데시주(州) 티루파티에 있는 티루말라 벤카테슈와라 사원(Tirumala Venkateswara)은 소원을 들어주는 신 Venkateswara’를 모신,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사원 중 하나.
인도의 주요 삼신은 우주의 세 가지 근본 기능, 즉 창조의 신 브라흐마, 질서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인 시바가 있다. 이들을 트리무티라 한다. Venkateswara(또는 발라지)는 비슈누의 아바타 중 하나이며, 힌두교에서는 부처님 또한 비슈누의 아바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