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과잉 부여

인도에서 다시 태어난 날_갑자기 철학 편(編)

검사결과를 받은 후 두어 시간 내에 인도 시술 결정, 태국 호텔 취소, 항공일정 연기를 했다. 병원에 연락하여 견적을 받았다. 워낙 시술이 자주 있는지 패키지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외국인과 외국거주 인도인에게는 30%의 할증이 붙었다. 나는 의사 이력과 견적서를 GPT에 업로드했다. 견적내용, 병원장비, 의사 이력 등을 분석해 답변을 주었다.


"복잡한 심장 수술을 다른 의사들에게 가르치는 전문의이며... 패키지에 적혀있는 장비와 시술 방식으로 보아 국제적인 수준의 병원입니다... 미국 대비 경쟁력 있는 가격이며... 인도의 관상동맥 스텐트(PCI) 기술 수준은 세계적으로 상위권이며, 대도시 상급병원에서는 한국과 임상 성과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AI 에이전트가 없던 시절이었으면 남의 나라에서 심장을 맡길 엄두라도 냈을까? 아마도 이렇게 빨리 시술하기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입원 수속을 하고 병실을 배정받았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조영술실로 옮겨졌다. 한국 대형병원 유튜브 채널로 본 시술실 장비들이 보였다. 손등, 팔, 대퇴부에 바늘이 박혔다. 한국은 손목, 요골 동맥을 통해 시술한다는데 의사는 사타구니의 대퇴동맥에 국소마취를 했다. 석회질을 뚫기 위해 로타블레이터(다이아몬드 드릴)를 써야 할 경우 사타구니가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줬다.


카테터가 심장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비수면 위내시경 할 때 내 위의 위치가 어디인 지 확실히 알게 된 것처럼, 내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뇌리에 각인되었다. 조영제가 투입되자 모니터 화면에 관상동맥이 보였다. 심장을 둘러싼 동맥의 모양이 왕관 모양이라고 관상동맥이라더니 신라 왕관 같은 모양이었다.


주치의가 보조 의사에 이것저것 주문을 했다. 인도 악센트가 있는 빠른 말투라 다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스텐트 길이, 직경, 브랜드를 말하는 듯했다. 보조 의사는 "... 유럽과 미국에서는 있는데 in India... is not availabe..." 헛...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도에는 없다니... 허허허... 이미 후회하기엔 늦었으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내 심장에 집중했다.


첫사랑을 우연히 길에서 재회했을 때, 실연의 아픔, 깊은 슬픔, 가슴을 치며 한탄하는 느낌이 2~3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심장에 빠르게 지나갔다. 풍선을 부풀려 혈관에 압력이 가해지고 일시적으로 혈류가 멈춰졌기 때문이다. 감정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물리적 현상이었다니...


시술은 삼십 분 남짓만에 능숙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리에 압박 붕대를 감아 지혈을 했다. 지혈한 다리를 8시간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침대에 실린 채 ICU로 옮겨졌다. 24시간 전담 간호사가 배정되어 생체신호를 꼼꼼히 기록했다. ICU에는 전자기기 반입이 금지되어 스마트폰 대신 책을 한 권 들고 들어갔다. 병원에 올 때 재작년에 사둔채 읽지 못했던 "초역(超譯) 니체의 말 II"을 골랐다.


세상과 삶에 대한 이백 스물 새 개의 니체의 말을 일본의 철학자이가 작가인 시라토리 하루히코가 알기 쉽게 풀어낸 밀리언 셀러이다. 잠이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하며 간결한 문장에 여백도 많아 250페이지 남짓한 책을 끝까지 읽었다. 오십 세 마지막날 집중치료실에서 읽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라 여겨졌다.


성장에 대한 갈망, 치열한 삶에 대한 가치, 자기 주도적인 삶에 대한 철학자의 외침이 들리는 듯했다. 욜로와 즐기는 사람에 대한 설파가 가득한 인스타 속 페르소나가 가득한 요즘, 노력 없이 즐기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공은 없다고 일갈하는 꼰대이길 두려워하지 않는 서장훈이 떠올랐다. 김연경 선수의 식빵과 이글거리는 반짝이는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본 사람은 이미 철학가나 마찬가지다.


벽시계 시침이 열두 시를 지났다. 만 쉰한 살이 되었다. 북인도에서 봄의 시작으로 축하는 Holi가 되었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이자 개기월식이 있는 날이었다. 심장을 물리적으로 느낀 날이었다. 단지 하루 사이에 50을 뒤로하고 새로운 1이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인도나이 한살이다. 철없는 아저씨의 오두방정이자 의미의 과잉부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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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로 돌아가려면 아직 열두 시간이 남았다. 책을 한 번 더 읽었다.

"178 일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211 고통은 인생이 주는 선물"

"216 인생의 의미는 그 손안에 있다"

몇 가지 글귀가 가슴에 꽂혔다.


기왕 오늘에 대한 의미를 과잉부여한 김에 "살다 보니 알게 된 사소한 철학"이라는 부제로 니체 흉내가 내고 싶어졌다. 어린 후배들과 점심을 먹으며 늘어놓던 두서없는 부장님 잡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산 50년 생각을 정리하기에 어울리는 나라에서 적절한 나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집필의 용기를 주었다.


아무리 AI가 딸깍 한 번에 니체, 부처, 힌두교를 기가 막히게 설명해 주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직접 겪은 삶의 의미는 나의 고유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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