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중구 충무로 3가 사랑방칼국수
종로 피맛골이 사라지고, 인사동과 삼청동의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된 지금 노포의 명맥이 그나마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충무로이다. 명동과 필동, 광희동을 관통하는 길로 특히 충무로 1·2가는 배수가 되지 않은 질척한 길이라 <진고개>라 불렸었다. 오죽하면 남산골 가난한 선비들이 질척한 길을 다니느라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해서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표현까지 나왔을까.
한반도를 침탈한 일제는 이 지역에 공사관(이후 이 지역에 조선 병탄 목적의 통감부가 세워지고, 공사관은 통감관저로 활용된다)과 일본인 집단 거주촌을 만드는데, 광복 이후 이 거리에서 왜색을 걷어내고자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물리친, 그리고 이 근방(현재의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신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 <충무로>라 명명하였다.
봉준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작품상 등 4관왕의 기염을 토하며 새삼 한국영화의 위상과 함께 재조명받고 있는 곳이 바로 <충무로>이다.
과거 충무로는 단성사, 국도극장, 스카라극장, 명보극장이 자리했던 영화 산업의 중심지이자 영화배우들의 단골집이 즐비했던 핫플레이스였다. 영화가 발달하니 배우들의 사진을 찍고 현상하던 현상소와 영화 홍보 전단을 만들던 인쇄소가 충무로 일대에서 성황을 누렸던 것은 일종의 낙수 효과라 할 수 있다.
주말에는 암표 장사가 횡행했을 만큼 인기였던 충무로 극장은 2000년대 들어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급격히 시들었고, 컴퓨터의 발달과 프린터의 대중화로 인쇄업은 쇠락하여 서울에서 가장 번성했던 거리 중 하나인 충무로는 그렇게 스러져갔다. 과거 찬란했던 영화 거리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그 와중에 살아남은 가게는 자연스레 세월을 먹으며 여전히 변하지 않는 손맛과 푸짐한 인심으로 직장인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있다.
직장인의 고단한 하루를 충전해줄 음식으로 고기 가득들어간 뜨끈한 국물만한 것이 또 있을까? 고기로 낸 국물 중 영혼까지 어루만져주는 닭고기의 감칠맛을 이길만한 식재료가 또 있을까?
이 조건에 완벽히 부합되는 음식이 바로 1968년 개업한 사랑방칼국수의 <백숙백반>이다.
상호에서도 알 수 있듯 초창기 이 집의 대표 메뉴는 칼국수였다. 식당이 영업을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은 베이비 붐으로 인구는 크게 증가하고, 쌀 생산량은 부족하여 정부가 <혼분식 장려운동>을 강제하던 시기이다.
지금은 "세상에 이런 일이" 수준의 이야기지만, 실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무미일(無米日)로 정하여 쌀로 만든 음식은 판매할 수 없었고, 쌀의 소비를 줄이고자 밥공기를 작은 크기로 규격화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시 유행했었던 음식이 미국의 원조로 값싸게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밀가루 음식인 칼국수와 수제비이다.
벼의 품종 개량으로 쌀 생산량이 확대되고, 라면과 식빵과 같은 분식이 식생활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자 198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혼분식 장려 운동 역시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즈음 사랑방칼국수 식당 또한 메뉴를 개편하게 되니 하얀 쌀밥과 먹을 수 있는 <백숙백반>이다. 50여 년을 훌쩍 넘었다고는 하지만 허름한 외관의 식당 하나가 정부 정책의 시대적 변화와 동네의 역사를 모두 품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백숙백반을 주문하면 백숙 반마리와 양은 냄비에 담아낸 닭고기 국물, 공깃밥이 상에 오른다. 은은한 마늘향이 맡아지는 국물에 밥 한술 말아 뜨는 순간 고단했던 하루는 사르르 풀리고, 맨손으로 뜯어내는 닭다리살은 허기짐을 단번에 메꿔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