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 잉글랜드왕돈까스
<경양식>은 격식을 갖춘 양식을 줄인 “가볍게 간소화된 서양식 요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경양식당에서 돈까스를 주문하면 마카로니와 양배추 샐러드, 밥 등이 한 접시에 제공되기도 한다.
19세기 중반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서양 문물이 유입되며 근대로 나아가는 도중 유입된 서양 음식들이 일본식으로 리뉴얼되어 화양식(和洋食) 요리라 불렸었고, 일제 강점기 당시 화양식 요리가 한반도로 유입되며 <경양식>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업력의 경양식당은 1925년 경성역사 준공과 더불어 역사 내 식당으로 개점한 <서울역 그릴>이지만, 경양식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국민소득이 급격히 증가했던 1970년대 이후였다. 70년대 전후 태어난 세대들에겐 경양식보단 <칼질>이란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당시 경양식 돈까스의 인기는 굉장했었다. 수저와 젓가락만 사용하던 시대에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서 먹는 음식이라니 이 얼마나 신문물이었을까.
대중적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경양식 돈까스는 외식 메뉴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부터 인기가 급격히 인기가 식어 <기사식당>으로 명맥을 이어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십수 년간 최전성기를 맞이한 <패밀리 레스토랑>에게 그 영역을 완전히 잠식당했다.
1989년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와 함께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나라의 국민으로 "지구촌의 글로벌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서양의 문화를 제대로 경험해봐야 한다는 동경이 생겨났고, 이전에는 먹어보지 못했던 폭립, 화히타 등의 신(新)메뉴로 무장한 패밀리 레스토랑이 동경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며 경양식당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온갖 먹거리의 정글인 서울에서도 경양식 돈까스를 기사식당이나 분식당이 아닌 정통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는 곳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의외로 <동인천> 지역은 “경양식의 성지”라고 불려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레스토랑의 원형과 레시피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추측컨대 개항장인 제물포가 속한 동인천 지역이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와 은행 등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곳이자 일본을 경유한 서양 음식이 최초로 국내 자리 잡은 지역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개항 이후 서양인들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덩치가 커서 마치 큰 불상(大佛)을 연상케 했던 일본인이 인천 중구 중앙동에 세운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바로 대불호텔이다. 경인선이 놓이기 전 제물포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인천에서 하룻밤 숙박을 한 후 서울로 향해야 했고, 대불호텔은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세워졌다.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이했고, 서양 음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개화기 당시 경양식이 한반도에 뿌리내린 곳이 외항 여객선의 도착지인 인천이었기에 지금도 경양식이 강한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토양이 아녔을까 생각해본다.
인천 경양식 돈까스의 성지인 잉글랜드왕돈까스는 1981년 개업한 노포이다. 언젠가 미식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이들과 경양식에 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 식당은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경양식 레스토랑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40대의 추억 서랍 속 경양식집은 굵다란 메뉴판과 묵직하게 잡히는 커트러리, 나비넥타이와 조끼를 입은 멋들어진 웨이터, 소파로 이루어진 테이블, 접시에 꾹꾹 눌러 퍼준 밥 등의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맛이야 삼대천왕과 수요미식회가 이미 검증했다지만, 워낙 고급 먹거리가 흔해진 지금 누군가의 입맛엔 부족할지 몰라도 <추억뽕>에 사로잡힌 내 입장에선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나 가니쉬로 당근 조림과 오이무침이 나왔는데 이건 레트로를 넘어 나를 잠시 돈까스를 좋아하던 국민학교 4학년생으로 만들어버린 타임머신이다.
커트러리가 담긴 종이봉투에 멋진 글귀를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맛있는 음식이 없다면 멋진 인생도 없다.”
당신도 달콤한 마법 주문 한토막으로 1980년대를 경험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빵으로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