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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 느티나무 Jan 23. 2021

미국에서 전업 주부

풀타임 잡(Fulltime Job)

일찍 결혼한 친구가 결혼하면 너무너무 좋다며 아이들 키우는 얘기를 곁들였다. 이러이러하게 키우는데 나중에 몰라 주기만 해 봐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듣고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일찍 결혼한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당연한 아이들 육아에 보상을 바라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가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전 근대적인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하고 남들이 보기에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른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가 되자 (그 당시는 흔한 일이 아니었음)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과 나 모두 결혼을 염두엔 둔 만남이었기 때문에 온라인 데이트를 한지 반년쯤 되었을 때 남편이 한국으로 와서 첫 만남을 가졌고 세 번째 만남에서 시집 식구들 모두가 한국으로 와서 약혼식을 가졌다. 시댁 식구들의 좋은 집안 분위기로 그간 엄마나, 동생, 친척들이 가졌던 우려를 씻고 홀가분하게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유아기 일 때

갓난아기가 태어나서는 밤에 잠을 설치고 방해받지 않는 잠을 자 본지가 언젠가 가물가물해질 무렵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6 개월은 고생한 것 같다. 마음 놓고 샤워를 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 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이 또한 몇 개월은 걸렸을 것이다. "젖만 먹이면 잘 자서 4 남매 키우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다"는 엄마의 얘기는 전설적으로 들렸다. 엄마의 얘기가 맞는지 납작한 내 뒤통수는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중에 하나였다. 우리 애들은 길게 낮잠을 자지 않아 힘들었고 잠을 잘 때는 예쁜 뒤통수를 만들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젖히니 고개를 가눌 때쯤 되면 한시도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다. 혹시 고개를 가누다 머리가 무거워 질식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조금씩 기어 다니기 시작할 때는 안전사고를 염려해서 위험한 물건을 다 치워도 어디서 다칠지 몰라 항시 감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세 살쯤 되니까 좀 쉬워진 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실내 어린이 놀이터에 데리고 갔는데 아직 다리가 짧아서 올라가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언제 커서 저기를 마음껏 올라 갈지 그 높이가 나에게 산처럼 느껴졌다. 여름에는 비치에 나가서 물장난 모래 장난하면서 놀아도 내게는 일이지 결코 재미가 아니었다. 물가 심지어 풀장에서 놀아도 10초 이상 눈을 떼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국에는 잔디 마당이 있고 옆집에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 아이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플레이 데이트라고 해서 대부분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하고 약속 시간을 잡고 데려가고 데려와야 한다. 바로 옆집에 같이 놀 또래가 있다는 것은 거의 천우신조이다. 그렇다 해도 애 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잔디밭은 도로와 경계가 뚜렷해서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다들 좁던 넓던 자기 잔디 마당에서 놀기 때문이다. 서브에서는 조심해서 천천히 운전하기 때문에 안전한데도 미국 사람들의 애들 보호는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남편 왈"안전한 동네라도 지켜봐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지켜보지 않으면 아이들 방임죄로 찍힐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들이 학령기 일 때

아이들이 세 살 정도 되면 프리 스쿨에 보내는데 하루에 2시간 반 정도 한다. 그때부터 소소한 스포츠, 어린이 축구, 체조, 댄스 등 커뮤니티 스쿨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다. 아들은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어린이 축구를 했고 수영 클럽에서 수영을 한 4년 정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라이딩, 차로 데려가고 데려와야 한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는 주로 아이들을 데이케어에 맡기니까 아무래도 베이비 시터가 하지 않는 이상 스포츠에 깊이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일 년 내내 하는 클럽 스포츠와 달리 커뮤니티에서 하는 스포츠는 보통 두 달 정도 된다. 여름에는 서머 캠프가 있고 교회의 프로그램도 일 년 내내 돌아가 아이들을 지루하게 놔두지를 않는다. 수많은 팀 스포츠의 연습과 경기를 통해 팀워크를 배우고 고생(사서 하는 재미있는)을 배우며 인생의 쓴맛(이기고 지는 것)을 배운다. 딸은 피겨스케이트를 8살부터 시작하고 스케이트 링크가 멀어서 운전해 데려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눈이 많이 오는 겨울 철에는 더욱더. 중학생이 되면서 링크를 집에서 좀 더 가까운 데로 옮기고 본격적인 선수 생활?처럼 몰입하였다.


중학생이 될 때쯤 스포츠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경기를 커뮤니티 내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시 심지어 다른 주로 가기도 한다. 일주일 내내 연습이 이어지고 주말에도 경기가 있으며 주요 경기에는 학교도 빠지는 일이 생긴다. 이때쯤 되면 두 아이의 스케줄을 짜는 것은 거의 예술 수준이 된다. 학교에서 하는 스포츠(아들 풋볼)도 해야 하니까 아빠가 전적으로 참여하여 손을 보태서 한 사람이 하나씩 맡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애들 스포츠에 들인 시간, 데려가고 데려오고 기다리고, 먹이고 하는 시간들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사는 곳의 미국 중산층이 비슷하게 스포츠에 열중하지만 클럽 스포츠를 하는 경우는 비용과 시간면에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마 내가 아이들에게 한 것은 아마 상위 5%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정도의 투자였다. 선수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재능이 있었고 무엇보다 좋아하니까 시킨 것이었다. 건강이 평생을 두고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하니 신체단련(스포츠)에 들인 돈은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학교 갈 때는 스쿨버스를 타고 가는데 우리 서브에서 스쿨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면 10분 정도이고 차를 타면 2분 정도로 참 애매한 거리라 아이들이 특히 딸은 걸어가기 싫어하고 스포츠 스케줄 때문에 집에 걸어올 시간도 아껴야 대부분 픽업하거나 아니면 자가용 등교도 많이 하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차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지 단 하루의 공백이 생겨도 스케줄 2~3개가 펑크 나는데 어찌어찌 다 소화를 했다. 참 그러고 보니 나는 아픈 적도 없었네!


내가 직장에 다니게 되었을 때

말 안 통하는 유아를 키우는 때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해서 나름 부지런히 지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커뮤니티 칼리지에 웹 개발자 프로그램에 등록하여 배움을 계속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학교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가까이 사시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캠퍼스 바람을 쐴 때면 "아 내가 살아있구나!” 하는 아이들을 캐어하는 엄마로서의 내가 아니라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온 느낌은 그 어느 것 보다도 내게 충만감을 주었다.

기회가 닿아 GM에 IT technician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성인을 상대한다는 사실과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 딸(초3)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엄마의 삶이 꼭 집에서 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 사회생활이 가능한 엄마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모른다. 일하는 것이 육아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성경에 <이브가 사과를 따먹어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에게는 평생 일하는 고통을 주었다>했는데 내게 있어 일은 해방이자, 성취감을 주는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정말 집, 아이들 아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에 강도보다는 속도와 분량이 많아서 머리를 계속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의 3년 정도 일을 해갈 무렵, 의자에 앉아서 컴퓨터 화면 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출퇴근과 일하는 8시간을 합쳐 9시간 반을 소비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요리, 청소, 빨래를 그전처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집안일이 점점 어렵고 어지러워 지자 남편이 청소 도우미를 고용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어떤 때는 몸이 피곤해 내키지 않아서 아이들 학교 행사에도 빠지게 되고 스포츠 경기에도 빠지게 되었다. 계약이 끝나고 해고될 때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주는 것처럼 내 결정을 대신해 주어서 미련 없이 나왔고 그 뒤로는 풀타임 잡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


어떻게 가사 노동을 줄였나

-설거지: 결혼과 동시에 식기 세척기를 사용했다. 넣고 빼고 하는 것도 일이 지만 미국에서는 전기료가 저렴하고 뽀송뽀송하게 소독되는 것이 좋았다.

-세탁:아이들과 내 빨래 만으로도 바구니가 꽉 차 힘들어 하자 남편이 옷가지가 크므로 자기 빨래는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지금 까지 그렇게 이어져 온다. 결혼 초부터 건조기가 있어서 옷을 세탁과 동시에 건조할 수 있어 좋았다.

-청소: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먼지가 쌓이는 것을 못 보는 내가 청소기를 자주 돌린다(주로 아래층)

-장보기: 코스코나 가까운 그로서리 가게에서 카트 가득 식품을 싣고 차에 옮기고 집으로 와 다시 짐을 내려 냉장고나 팬 추리에 집어넣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죽하면 장 봐주는 서비스가 있을까!

-요리: 결혼하고 처음에는 하루에 두 번 요리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놀라는 눈치였다. 내게 당연한 것이 었는데 미국 사람들은 주로 준비된 음식을 주로 전자레인지에 덥혀 먹거나 반조리된 냉동 음식을 오븐에 넣으면 요리라고 한다. 직접 밀가루 반죽을 해서 만들거나 채소를 다듬어 무엇을 만들면 scratch라고 한다. 두 번 쿡(지지고 볶고)한다고 하니 경이로움으로 나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피자는 정식이지 간식이 아니다. 아침은 주로 시리얼이나 오트밀을 먹고 점심은 학교 급식을 먹으니 하루에 한 번 요리를 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뜸하다. 알바는 하는 아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는 횟수가 늘어서이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치폴레’(Chipotle) 멕시칸 음식이다. 딸은 아빠 입맛을 아들은 내 입맛을 닮아서 주로 아들과 남편을 을 보고 한국 요리를 했으나 좋아하는 메뉴는 한정이 되어 있고 야채를 먹이려는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아이들이 운전면허를 따고 다시 찾은 나의 삶

고등학교 2학년(주니어), 만 16살이 되면 운전면허를 갖는 법적 나이가 된다. 운전 수업을 방과 후 학교에서 받을 수가 있다. 학교는 건물만 제공하고 서비스하는 업체와 연계가 되어 있을 뿐이다. 실기 시험이 통과하면 부모가 동승한 연습 시간을 채워야 하는 데 보통 15살에 등록을 해서 16살 생일이 되는 날에는 충분한 연습 시간을 갖게 되고 생일을 지나면 운전 면허증을 받게 된다. 아들이 운전면허를 받게 된 날 두 아이의 스케줄을 저글링 하던 나의 번거로움이 반으로 줄었다. 딸만 케어하면 되니 일손이 얼마나 줄었나 모른다. 이제 딸이 운전면허를 갖게 되자 등교, 스포츠, 친구와 행아웃(놀러 다니기)등 완전히 내 손을 벗어났다. 서운하냐고? 천만에! 내 시간을 오롯이 가져 본 적이 언제인가? 육아는 정말 지난한 과정이다.


공부보다 친구 사귀는 것에 항상 우선순위를 두었던 지라 딸이 과하다 싶게 친구 집에 놀러 다니면 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이를 여동생에게 말했더니 "언니, 혹시 외로운 것 아냐?" 한다. 내가 이 말을 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왜냐면,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한 말(자식 한데 서운하다)을 내가 내뱉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미국에서는 다행히 가사 노동을 하는 전업 주부를 낮춰 보지 않는다. 직장을 갖게 되면 베이비 시터, 청소 도우미를 고용하여 가사 및 육아의 도움을 받는다. 아이를 전적으로 키우는 주부들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두 자녀이고 세 자녀, 다섯 자녀도 보았다. 직장을 갖던 집에서 아이를 돌보던 전적으로 와이프의 의견이 반영이 되고 이를 존중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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