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과 시계 없이 무인도에 떨어졌다면?
이번 학기에 제가 맡은 수업 중 '한국의 과학 인물 열전'이라는 교양과목이 있습니다. 저는 나름 과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지난 몇 학기 동안 이 수업을 맡으면서 각종 교양과학서를 탐독하며 나름 신경을 많이 써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학기에 몸이 안 좋아서 강의를 쉬었고, 이 수업도 반납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업을 다시 언제 맡을 수 있는지 현재로서는 미지수인 상황이고요. 지난겨울, 이번 학기 강의에 써먹기 위해서 구상해 놓은 사고실험이 있어서 여기다 소개합니다.
한국 과학인물사 수업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세종대왕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는데, 과학기술사 방면 역시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저는 그중에서도 한글창제로 이어지는 음운학 연구와 '의표창제(儀表創製)'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물론 활자나 측우기, 의학, 농학 등 방면을 설명할 때도 언급됩니다)
'의표창제(儀表創製)'라는 것은 천문관측 도구를 조선을 기준으로 맞추는 작업으로, 최종적으로 천체관측도구인 '간의(簡儀)'를 만들어 설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해시계나 물시계를 비롯한 각종 시계류나 역법서인 『칠정산(七政算)』 등이 편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은 정확한 1년의 길이와 하루의 길이를 알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유교적인 질서를 확립하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세종이 그러한 것들을 맨바닥에서부터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서양(특히 이슬람)의 천문학과 역학(曆學, 날짜를 계산하여 달력을 만드는 학문), 기계공학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세종은 그런 지식을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들을 투입했고, 그들이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간의와 『칠정산』을 내놓는 데까지 대략 7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휴대폰으로 달력과 시간을 확인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날짜와 시간은 서버에서 휴대폰 단말기로 기본 제공되는 것이고, 그것을 알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제 젊은 친구들은 시곗바늘이 왜 시계 방향으로 도는지도 모르고(혹시나 답을 알려드리자면 해시계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방향), 심지어 아날로그 시계를 읽는 법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들이 무지한 것이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날짜와 시간을 알기 위한 노력을 체감하기 위해서는 직접 달력과 시계를 만들어 보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하지만 빈손에서 출발한다면, 천문학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제대로 된 달력과 시계를 만들기 위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결국 사고실험을 하는 것으로 대체하면 어떨까, 해서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설계해 보았습니다.
※ 단, 음력은 매우 귀찮으므로 양력 달력만 만들겠습니다.
※ 섬에는 돌(바위, 조약돌), 나무(대나무), 끈 등과 같은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칼, 송곳, 도끼, 망치, 톱 등 기본적인 공구는 갖고 있다고 칩시다.
1. 정남과 정오를 알자 - 해시계 만들기
날짜가 하루씩 지나가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재기 위해서는 우선 정오부터 알아야 합니다.
정오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해시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편평한 바닥에 나무를 꽂아 태양빛으로 생기는 그림자를 수시로 따라 선을 그리다 보면, 그중 가장 짧은 그림자가 생기는 방향이 정남 쪽입니다. 그리고 정남에 그림자가 생기는 시간이 정오가 됩니다.
첫날은 한나절 정도 수시로 선을 그어야겠지만, 둘째 날에는 첫날에 그은 선 중에서 가장 짧은 선이 있는 근처 구간에서만 작업을 하면 될 것입니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이것을 최소 일주일은 반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괜찮은 해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흙바닥보다는 편평한 바위 표면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막대기를 꽂고 바위 표면에 조약돌로 선을 긋는 방식이 좋을 것입니다. 흙바닥에 선을 긋는 조악한 방식으로 만들다가는, 비바람이 불면 크게 낭패를 보고 말 겁니다. 바위에는 어떻게 구멍을 뚫냐고요? 조약돌을 송곳 삼아 며칠이고 돌려가며 비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바위가 좀 무르다면 가지고 있는 쇠로 된 도구를 잘 이용해 봅시다.
2. 자정과 24시를 알기 - 물시계도 만들자
정오를 알았으니, 정오부터 다음날 정오까지가 하루의 길이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하루가 얼마의 시간이 되는지 하는 감각은 없습니다. 하루를 24개로 나누어서 각각을 1시간으로 삼는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양적으로 재는 데에는 아무래도 물시계를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시계의 각도를 나누면 되는 것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태양이 뜨는 시각과 지는 시각에 대한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임의로 각도를 나누면 정확한 시간이 나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계절마다 그림자의 각도가 달라지는데, 우리는 아직 계절을 측정하지 못했습니다.
물시계는 수조의 구멍을 통해 물을 한 방울씩 흘려보내어서 그걸 모아서 시간을 재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방울 수를 세고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지요. 결국 물받이 그릇에 일정 양이 모이면 비워내는 식으로 해야 하는데, 일본의 정원 장식물인 시시오도시를 이용하면 간편할 것입니다. 즉, 하루 동안 시시오도시에서 몇 번이나 ‘탕’ 소리가 나는지를 세는 것이지요. 시시오도시 통 크기를 조절하면 간격을 조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정오와 그다음 날 정오까지) 동안 소리 나는 횟수를 재면, 정오와 정오 한가운데가 자정이 됩니다. 그리고 하루에 24번 소리가 나도록 할 수 있다면 각각이 1시간이 됩니다. 낮시간에는 해시계에 각각의 시각마다 선을 그어두면 편하긴 할 텐데, 이것도 계절이 바뀌면 정확도가 매우 떨어집니다. 결국 해시계를 앙부일구처럼 눈금을 그어 업그레이드해야 할 겁니다.
다만 물시계가 알리는 하루 길이는 정확하지 않으므로, 해시계의 정오를 기준으로 자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 수조나 시시오도시는 어디서 구하나고요? 식량 채집하고, 불 피우고, 밥 짓고, 해시계에 줄 긋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뭐 하겠습니다. 나무, 대나무 같을 걸 가지고 직접 만들어 봅시다.
3. 달력 만들기 - 규표가 필요하다
"1년이 365.25일이다, 1달의 길이는 30~31일이 번갈아 오되, 2월은 28일로 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어 2월을 29일까지로 한다", 이 정도면 그레고리력은 아니라도 율리우스력 정도의 정확성을 가진 달력을 만들 수 있다는 정도의 기본 상식은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동안 쓸 거라면 율리우스력 정도라도 꽤 정확한 달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역학적 지식을 알더라도, 오늘이 대략 몇 월 며칠 정도 되는지를 모르면 달력을 만들 수 없다는 겁니다. 날짜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으로 삼으면 될까요? 바로 1년 중 낮이 제일 긴 날인 '하지'입니다.
언제가 하지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시 해시계가 필요합니다. 기준이 되는 해시계 옆에 다시 해시계를 만듭시다. 이 새로운 해시계는 정오에 그림자 길이가 얼마인지를 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더 길게 만드는 것이 편할 테니, 기존의 해시계보다 훨씬 더 긴 장대를 바닥에 꽃아 봅시다. 이것을 '규표(圭表)'라고 합니다.
이 규표를 가지고 매일 정오에 그림자 길이를 측정해야 하는데, 몇 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규표로 측정된 그림자가 제일 짧은 날은 하지가 되고, 제일 긴 날은 동지가 됩니다. 하지로부터 다음 하지까지가 1년입니다.
하지를 6월 21일로 삼아 율리우스력에 따라 달력을 만들면 괜찮은 양력 달력이 됩니다. 필요하면 계절이나 절기를 달력에다 표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와 동지 가운데 날짜에 춘분이나 추분이 들어가는데, 그날 정오에 그림자 각도를 재면 대략적인 섬의 위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의 4계절이나 24절기는 여러분의 무인도 생활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긴 합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계절과 절기를 제정·공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이미 여러분은 섬나라에서 세종대왕과 같은 업적을 남긴 임금님이 되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