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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투성이, 영화 〈국보〉(2025) 감상

좋은 영화지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을 길게 써보는...

by 정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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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자 보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온나가타(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배우)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 '인간 국보(2025년 현재 한국 기준으로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을 그린 영화입니다. 재일교포인 이상일 감독이 연출하여 1000만 관객을 모으고 구로자와 아키라상을 받는 등 흥행과 작품성 양쪽에서 성공을 거둔 기념비적 작품이지요.


제가 보기에도 2시간 55분가량의 러닝타임이 후딱 지나갔을 정도로 재미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가부키 무대 장면은 숨을 참고 감상할 정도로 굉장한 몰입감을 주며, 동시에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상황을 대변해주는 역할까지. 여기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까지 어우러져 강추할 만합니다.


주인공은 인간 국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우여곡절을 겪게 되지만 다소 순탄하게 해결되는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후반 인터뷰 장면에서 기자가 주인공의 삶이 순탄하고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삶이었다고 했는데, 물론 그것은 성공한 주인공의 겉모습만 바라본 기자의 오해라는 식으로 연출된 것이지만, 저는 이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체 흐름에서 그런 요소를 하 번 나열해 볼까요?(강한 스포 주의)




1. 우선 본인이 재능과 목표의식, 성실성을 겸비하고 있음.

2. 아버지가 살해되면서 야쿠자의 길을 포기하고 배우가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어짐.

3. 아버지의 복수를 시도하는 장면에서 권총을 들고 같이 참여한 친구와는 다시 엮이지 않음.

4. 초반에 유명 배우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되어 그의 집에 얹혀살고 새 성씨와 예명을 받음.

5. 얹혀살게 된 집의 아들은 라이벌이지만 평생의 절친임.

6. 얹혀사는 집 안주인 역시 배우 보는 안목이 있어 아들이 주인공에 못 미치는 것을 알고 있음. 아들이 습명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지만 특별히 더러운 계략을 꾸미거나 하지는 않음.

7. 어린 시절 주인공의 미모를 보고 치근덕거리는 어른도 없고, 본인도 성정체성으로 고민하지 않음. 사춘기의 성장통이랄 것도 크게 없음.

8. 혈통을 언급하며 빌런이 될까 걱정했던 스폰서 기업 사원은 그냥 T 성향이 강한 조력자로 남음.

9. 배우로 성장할 꽃봉오리가 터질 무렵 스승이 교통사고를 당해 대타를 뜀.

10. 라이벌 친구가 주인공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고 주인공이 어릴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와 함께 사라졌고, 그 결과 주인공이 '한지로' 이름을 습명하게 됨.

11. 스승 부부는 내심 아들(라이벌 친구)이 습명하길 원했지만 주인공이 '재능(藝)'을 인정함.

12. 요정에서 만난 게이샤는 주인공의 딸까지 낳았지만, 주인공의 앞길을 막게 될까 봐 딸과 함께 사라짐.

13. 스승이 적당한 타이밍에 당뇨로 사망.

14. 도망간 친구가 돌아온 이후, 사생활 관련 기사가 터지며 고초를 겪는데, 가부키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주인공을 수발 들어주는 헌신적인 애인이 따라다님. 본업으로 복귀하기 전에 제 발로 떠남.

15. 라이벌 친구의 도움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곧 인기를 되찾음. 그런데 곧 친구가 가족력으로 심한 당뇨가 와서 다리를 절단. 친구는 은퇴에 즈음하여 2인 3각으로 이루어진 감동의 무대(소네자키신주)를 마치고 퇴장. 친구의 할복에 주인공이 가이샤쿠를 해주는 느낌이었음.

16. 성장한 딸과 마주했을 때, 딸은 한편으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프로로서 아버지를 인정해 줌.




대충 이런 식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에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그럴 때 주인공은 그냥 여건이 맞추어 열심히 연기만 합니다. 자기가 성공하기 위해 남을 핍박하거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주인공이 연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주변 인물들이 알아서 희생하거나 눈치껏 빠져주고 있습니다.


그런 희생 덕에 주인공이 국보까지 이르게 된 것인데, 거기 비하면 주인공은 딱해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지도 않고, 그냥 예술 그 자체로 승화해 버립니다. 결국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이 예술을 완성하는 데 도구로 활용되고 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 점은 중간에 몇 년씩 훌쩍 흘러가면서 그 행간이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데, 원작 소설에서는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에도 이와 비슷한 류의 성공드라마가 종종 나왔던 것 같은데, 대표적으로 만화 『시마 과장』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서도 주인공은 (가끔씩 제 손으로 운명의 방아쇠를 당기기도 하지만) 정공법을 고수하는 편이고, 주변에서 계략을 걸어 적을 물리치거나, 혹은 적대 세력이 제 꾀에 넘어가거나 하면서 성공스토리를 이루지요. 심지어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성이 혼자 몰래 아이를 낳아 키운 덕에 주인공은 불륜 및 사생아 양육에 대한 부담을 완전 면제받았고, (주인공을 흠모하는) 게이 친구는 제 역할을 다한 후 사고로 죽거나 합니다.


관객(독자) 입장에서 보아 이런 류의 주인공은, 어떤 가치가 형상화 된 신화적 존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 공감의 대상은 되기는 힘들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건 재능과 운명의 인도로 이루어진 자수성가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사람의 희생과 배려가 있었음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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