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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 연구자로서 '용어 선택(wording)'의 문제

'트렌디'한 용어의 사용과 내 용어 유행시키기

by 정영현


나는 상대적으로 논문 제목을 지을 때 '트렌디(trendy)'한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한국중세사 전공자들이 대개 용어에 보수적인 성향이 있기도 하고, 내 개인적으로도 애써 유행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라 그런 것이다. 자칭 '고리타분한 힙스터'랄까.




생각해 보면 지도교수님으로부터 그렇게 지도를 받기도 했다. 교수님도 한국중세사 학계의 일원으로 잔뼈가 굵으시니 어련하시겠는가.


얼마 전, 쓰고 있던 논문 머리말에 '아노미(anomy)'라는 단어를 썼다가 지도교수님으로부터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게 적절한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아노미'라는 말이 신문 기사 등 매체에서 사용되어 온 지도 수십 년이 지났으니 이미 관용화되었다고 생각했다. 맥락 상 잘못된 의미의 용어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좀 '튀는' 것이다.


물론 교수님도 그런 용어 사용을 강경하게 반대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그 교수님으로 지도를 받은 선배 중에도 유행 중인 용어를 그때그때 사용하는 분이 계실 정도이니...




지난달에 어떤 학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역사학 관련 발표가 이어졌으나 한 발표자는 문학 전공자였다. 그분 발표 제목 말미에 '정동(affection)'이라는 용어가 붙어 있었다. 나도 요 근래 문학 방면에서 '정동'이라는 말이 남용 및 오용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발표자 분이 그랬다는 건 아니고, 그만큼 '핫한' 용어였다. 다만 참석자 대부분이 역사 연구자였고, 종합토론 좌장께서도 주로 한국 고대사 연구를 하시는 분이시다 보니, 종합 토론 전에 '정동'의 의미를 한 번 더 확인하고 가셨다.


그날 학술행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짐짓 궁금해져서 혹시 RISS(학술연구정보서비스)에 '명징하게 직조해 낸'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논문이 나온 적이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2019년 이동진 평론가가 〈기생충〉 영화평에 이 표현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현학적인 표현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명징하다'는 표현은 비평 쪽에는 더러 사용되고 있었지만, 대중들에게는 낯선 표현이었던 것이다. 검색 결과 서평 1건이 나온다. 그 서평은 2024년에 나온 글이니, 아마 이동진 평론가 이슈를 염두에 두고 일부러 지은 제목이 아닐까 싶었다.




또 근래 위와는 별개의 학회에 토론자로 섭외되어 참여한 적이 있다. 토론자는 보통 발표 주제와 비슷한 전공인 학자를 섭외하며, 토론자가 되면 발표자의 글을 미리 읽고 토론문을 준비해 가야 한다. 물론 나도 발표자의 글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발표자의 글은 기존의 연구에 비해 아주 새로운 사료를 소개하거나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의 발표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존에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용어가 있음에도' 본인만의 용어를 새로 만들어서 그 의의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의 용어보다는 조금 더 자극적인 표현이었다.


혹시나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여기서 그 용어를 예시로 들 수는 없다.(※ 앞의 '정동'은 흔히 쓰이는 용어이지만 그 학자분이 창안한 용어는 혼자 쓰는 용어라 특정될 수 있음) 하지만 중세사 논문에서 갑자기 '근대적인' 용어가 사용되면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앞의 '아노미'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을 경우, 대가 선배 혹은 동료들로부터 한 소리를 듣기 일쑤다. 하지만 간혹 그렇게 만들어낸 표현이 학계에서 유행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분명 기존에 같은 개념의 용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내가 근 20년째 고민 중인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선생의 '경계인(境界人, marginal people)'이라는 개념도, 이게 무라이 쇼스케 선생이 창안한 것인지, 다른 분야에서 사용되던 개념을 수용한 것인지, 기존에 있던 개념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인지 헷갈린다. 어쨌건 그는 중세 동아시아사 분야에서는 '경계인'이라는 용어의 창시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지만, 나도 가끔 과감하게 유행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혹은 자기 용어를 유행시키는 연구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먹히는 글'을 쓰려면 그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쨌든 스스로 '글쟁이'라 생각하니 일종의 마케팅 전략으로 해보는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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