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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가 대접받은 '서양 떡' 이야기

부산 OPS에 가면 사 먹을 수 있다고?

by 정영현
이날 배가 아카마가세키(赤間関,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는데, 사신들이 거듭된 항해로 피곤하여 출항하지 못하였다. 일행은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을 구경하였다.
쓰시마(馬島)에 있을 때 조선의 호남 사람이 혼슈(本州)에 표류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곧 무로쓰(室津, 야마구치 현 구마게 군)에 있다고 들었다. 길안내를 맡은 쓰시마의 가신 야나가와 가게나오[柳川景直]에게 그들과 접견을 부탁하니, 나가토(長門) 번주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휘하를 시켜 두 명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야나가와 가게나오가 오향주(五香酒)와 남만병(南蠻餠)를 선물했고, 밤에 번주가 큰 대접에 기이한 음식을 보내어 왔기에 일행이 나누어 먹었다.
- 『해사록』1607년 3월 24일


『해사록』은 경섬(慶暹)이 1607년 첫 통신사(회답겸쇄환사)의 부사가 되어 에도(江戶, 도쿄)에 다녀온 기록입니다. 여기 3월 24일 기록에서 '남만병(南蠻餠)'과 '오향주(五香酒)'를 대접받고 있습니다.


'오향주(五香酒)'는 정체를 잘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소주에 약재를 넣어 만든 담금주를 말하니 아마 대충 그런 류의 술로 보입니다. '남만병'은 일본말로 '난반모치/남방모찌'라고 읽는데, '서양 떡'이라는 뜻입니다. 그 정체는 무엇일까요?




에도시대 초기의 요리책 『남만요리서(南蛮料理書)』에 따르면 '남만병(南蠻餠)'은 밀가루(小麦粉), 녹말가루(葛粉), 흑설탕(黒砂糖) 등을 반죽해 쪄서 잘라먹는다고 합니다. 달걀이 안 들어가는 걸로 보아 카스텔라는 아닌데, 찐빵의 일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최근 롯데백화점 부산점에 갔다가 그곳에 입점한 부산 지역 유명한 빵집 '옵스(OPS)'에 들렀는데, 그곳에 '오키나와'라는 빵이 있는 것을 보고 아, 이게 바로 통신사가 먹은 '남만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보기에는 검은 카스텔라처럼 생겼는데, 폭신하기보다는 다소 쫄깃한 식감입니다. 잘라 놓은 술빵처럼 생겼지만 누룩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리서에 기록된 '남만병'과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은 참깨와 건포도가 박혀 있다는 정도입니다.


옵스의 '오키나와' 빵.


옵스의 빵 이름이 '오키나와'인 이유는 아마 오키나와 현지에 있는 비슷한 찐빵 레시피를 참고하여 만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검색히 보니 실제로 레시피가 올라와 있는 사이트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레시피 제목은 '오키나와풍 찐빵(沖繩風蒸しパ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http://www.kokutou1.net/recip/003/post_5.html


요약하면 강력분, 흑설탕, 베이킹소다, 우유를 반죽한 후 냉장고에서 하루 숙성하고, 그 위에 참깨와 건포도를 얹은 후 센 불에 15~20분간 쪄서 만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이킹소다가 없던 시절에는 누룩을 넣어 술빵 형태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만병'은 명칭을 통해 아마 서양 선교사로부터 들어온 레시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카스텔라와 달리 흑설탕이 들어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 설탕의 주요 산지이고, 지금도 흑설탕을 특산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오키나와에서 흑설탕으로 찐빵을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원래 오키나와는 사탕수수가 자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1623년 기마 신죠(儀間眞常)이라는 인물이 중국 푸젠 지역으로부터 도입했다고 합니다. 이때 오키나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 사쓰마 번이 아마미 제도를 비롯한 오키나와 지역에 사탕수수 생산을 강요하였고, 그렇게 생산된 설탕을 일본 본토에 팔아 큰 이익을 누렸습니다. 덕분에 일본, 특히 규슈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설탕이 비교적 흔한 식재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경섬 일행이 통신사로 가던 1607년 무렵은 본격적으로 오키나와에서 설탕이 생산되기 이전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남만병에 들어가는 설탕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되어 서양 상인 혹은 선교사를 통해 수입된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흑설탕은 일본에서도 비싼 식재료였을 겁니다. 그렇기에 외국 손님을 대접하는 데 귀한 흑설탕이 들어간 서양식 찐빵을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그 빵의 레시피는 아마 사쓰마 번의 지배와 함께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건너가 '오키나와식 찐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의 레시피는 세월을 넘어 전달되어, 부산 옵스의 '오키나와' 빵이라는 형태로 저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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