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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이 신지, 〈이사〉(1993)

이별을 통해 어른이 된다는 것

by 정영현

최근 각광받고 있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영화. 1993년 개봉작을 2023년에 4K로 리마스터링 했다. 아래 감상평은 영화를 보신 분들과 소통을 위해 쓴 것으로, 스포일러에 대해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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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모의 이별이라는 상황에 '떠밀려' 성장하는 소녀 렌(렌코)의 이야기.


2. 부모는 별거에 들어가며 각자 새 출발을 꿈꾼다. 부모는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딸이 납득해 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렌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본인이 나서서 이 상황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각종 깜찍한/발칙한/위험한 짓을 한다. 나는 처음에는 렌에게 이입하여 갈라진 부모 사이가 봉합되기를 원하였지만, 부모는 나름의 이유와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3. 엄마가 복도에서 남편 후배의 여자친구를 잡고 넋두리를 할 때 보면, 이 사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 렌이 외친다. "왜 낳았어?" 그에 이어지는 '유혈 장면'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사실 엄마의 각오가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반면 아빠는 애초 본인이 왜 별거를 원하였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딸의 숙제'를 통해 오히려 결심이 확고해진 듯하다.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부인의 마음을 떠본 것 역시 딸을 생각해서 그런 거지 재결합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홀로 떠나는 걸로 마무리.


5. 렌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런지 부모들이 무책임하다고 느껴지긴 한데, 사실 둘 다 특별히 악인은 아닐 것이다.(물론 아빠 쪽이 빌런 짓을 하긴 했지)


6. 이혼가정의 반 친구가 키가 큰 것도 '먼저 어른이 된 아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 친구는 혼자 장을 볼 줄도 아는데, 렌도 점점 그리 될 것이다. 다면 그 친구는 아버지가 재혼을 하면서 영영 멀어지고 말았다. 혹시나 자기도 그런 처지가 될까 싶은 렌의 두려움을 대변하는 폭우.


7. 비와호 마을, 렌이 다리 위에 있는 엄마에게 '빨리 어른이 될게'라고 외치는 장면. 렌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른이 되면 제멋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렌. 흰 옷에 나막신을 신고 동네와 야산을 헤맨다.


8. 할아버지 장면은 렌이 그래도 그간 부모와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고,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됨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한 장면이라고 생각.


9. 축제가 끝나고 가마를 불태우는 장면은 결국 즐거운 축제 같았던 유년기가 파국을 맞았음을 뜻한다. 환상 속에서 가마의 잔해와 부모가 호수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세 식구의 즐거웠던 추억도 침몰하고 만다.


10. 환상 장면을 일부러 현실에 가깝게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디서부터가 환상인지 경계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11. 떠나간 유년시절을 바라보며 "축하해"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 무엇을 축하하는 것일까. 결국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놓아주며 자신의 성장을 축하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신세기 에반게리온〉 마지막 장면에서 신지가 받은 축하랑 같은 의미일 것인데,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장면이 〈이사〉를 오마주한 것인지는 불확실.


12. 엄마는 딸의 '어른이 되겠다'는 말이나 '축하한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엄마는 딸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님. 밤새 딸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소통이 잘 안 됨을 은유했을 것.


13. 마지막 기차 장면이나 엔딩 스크롤 장면을 통해 렌이 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성장했나. 상황과 타협하는 법, 괜찮은 척 연기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 것이다. 어른들은 이제 렌이 '의젓해졌다(大人しい)'고 생각할 것이다.


14. 30여 년 전에 나온 영화다 보니 세월이 흐른 게 느껴지다. 주인공 배우는 나랑 동갑이다. 나카이 씨, 츠루베 씨도 그땐 참 젊었네, 싶다. 하긴 나카이 씨가 당시엔 30대 초반이었으니. 소마이 감독은 벌써 2001년에 세상을 떠났다.


15. 내 세대 한국 오타쿠들에게는 90년대 일본 풍경이 향수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다. 어린 시절 동경했던 곳이지만 공간적 장벽으로 갈 수 없었고, 이젠 세월이 흘러 일본도 많이 변한 탓에 시간적 장벽이 생겨버렸다. 그나마 배경이 고도 교토다 보니 비교적 덜 변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빠 회사 앞의 공중전화로 아빠 회사에 전화 거는 모습은 묘하게 낭만 치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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