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향기 속에 떠오르는 그날의 추억
제위보
어느 부인이 죄를 지어 제위보(濟危寶: 춘궁기에 빈민을 구휼하는 관청)에서 도역(徒役: 강제노동을 하는 형벌)을 하고 있었다. 그 손을 남에게 잡혔으나 그것을 갚을 길이 없는 것을 한스러워하며 이 노래를 지어 스스로 원망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한시를 지어 풀이하였다.
浣沙溪上傍垂楊 빨래터 곁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執手論心白馬郞 손을 잡고 마음을 이야기하는 백마 탄 사나이.
縱有連簷三月雨 처마 밑으로 3월의 비가 줄지어 떨어지는데
指頭何忍洗餘香 어찌 차마 손끝에 남은 향기를 씻어낼까.
- 『고려사』 권71 악지2 속악 제위보
〈제위보〉라는 노래는 고려속요 중 하나로 '남녀상열지사', 즉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원래 노래 가사는 남아 있지 않고 노래가 지어진 상황만을 서술하였고, 이어 문인 이제현이 그 사정을 한시로 지어 풀이한 것을 싣고 있습니다. 아마 그 원곡 가사가 『고려사』가 편찬된 조선 초의 윤리적 기준에 맞지 않거나, 혹은 『고려사』가 한문으로 기록되는 역사책이다 보니 원곡의 우리말 가사를 한문으로 억지로 옮겨 넣기 불편해서 원래 가사를 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현은 이 노래 외에도 몇 곡의 고려가요를 주제로 여러 편의 시를 지은 후, 하나의 장편 시인 악부(樂府)로 묶었습니다. 그 악부는 그의 문집인 『익재난고』에 「소악부(小樂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해석에서는 이 노래에 대하여, '죄를 지어 제위보에서 일하던 어떤 부인이 빨래터에서 외간남자에게 손을 잡혀서 이를 원망하는 노래'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절을 해치려는 남자를 원망하는 노래라는 거지요.
하지만 제가 원문을 다시 풀어 보니, 이 노래는 '간통죄를 지어 제위보에서 노역하게 된 부인이, 남자에게 유혹당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부른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날 그 남자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제위보에 끌려와 일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스스로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런 시각에서, 한 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니다.
주인공인 부인은 당시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백마 탄 남자가 다가오더니 손을 잡고 달콤한 말로 수작을 걸었습니다. 부인은 거기 홀딱 넘어가서 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손을 잡는다(執手/携手)'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다른 고려가요인 〈쌍화점〉이나 경기체가 〈한림별곡〉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즉, '몸을 섞기 직전 단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뒷부분이 이어집니다. 부인의 불륜은 결국 남편에게 발각당했고, 남편은 그녀를 간통으로 고발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제위보에서 노역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달픈 삶을 살게 된 3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음력 3월은 보릿고개에 해당하는 시기로, 제위보가 가장 바쁜 철이었습니다. 그녀는 제위보 관청 뒤뜰에 걸린 커다란 솥에 죽을 쑤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집니다. 그녀는 일손을 멈추고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잠시 한숨을 돌립니다. 건물 처마 밑으로 빗물이 주룩주룩 떨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봅니다. '내가 이게 무슨 신세람.'
그렇게 잠깐 '비멍'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봄꽃 향기인가?' 향기는 기억을 부릅니다. '프루스트 현상(Proust effect)'이라고 하던가요. '아, 그 남자!' 자기를 유혹하여 구렁텅이로 몰고 간 그 원망스러운 백마 탄 남자에게서 느꼈던 그 향기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옥가락지 끼고 있는 긴 손가락... 손깍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손가락을 코에 가져가 냄새를 맡습니다.
그렇게 혼자 몽상에 빠져 있는데, 비가 그치고 해가 비춥니다. 앗. 그녀는 저주해도 시원찮을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못나게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치맛단에 손가락을 쓱쓱 문지르더니 다시 죽을 쑤러 갑니다. 그리고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서 부지깽이를 들고 흥얼흥얼. 넋두리 같은 그녀의 노동요가 무심하게 제위보 담장을 넘어갑니다.
아, 남녀상열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