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일본 원정의 아찔한 추억
〈프롤로그〉
고려를 굴복시킨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은 남송 원정을 앞두고 후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일본을 굴복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원나라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274년, 원나라의 대군은 고려군과 함께 합포(마산)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일본 원정을 떠났습니다. 잠시 승승장구하는 듯이 보였으나, 폭풍에 휩쓸려 함선이 파괴되면서 철수하게 됩니다. 이어서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일본은 이들을 유인하여 모두 참수하고, 무사들을 규슈 지역에 동원하여 원나라의 다음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1276년, 원나라는 남송 수도 임안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에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괘씸한 일본을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합니다. 1279년,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였고, 이제 본격적으로 두 번째 일본 원정이 추진됩니다.
두 번째 원정은 1281년에 실시되었는데, 이때는 합포에서 출발한 원·고려군뿐만이 아니라 옛 남송 지역에서배를 타고 출발한 대규모의 '강남군'도 바다를 건너 합류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이 불어 함대가 괴멸되었고, 원정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른바 2차례의 '가미카제(神風)' 덕에 일본은 몽골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때 참전하여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탈출한 고려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풀어 봅니다.
1281년 2차 원정 당시, 2만 7천 명의 고려 장정들이 원정군으로 차출되어 일본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에서 7년 전에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갔다가 크게 낭패를 보고 돌아온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 바다를 건너면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두려울 따름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들 중에는 7년 전에 일본에서 살아 돌아왔다가 또다시 차출된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일본에 상륙하면 고려군은 군량을 생산하는 둔전병으로 부려질 거라는 얘기도 들렸습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고 보니, 전황은 생각보다 나빴습니다. 쓰시마(對馬)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실패한 원정군은 일단 이키(壹岐) 섬을 점령하여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하카타(博多) 해안에는 전에 없던 방벽이 갖추어져 있고, 훨씬 많은 병사들이 해안을 지키고 있어 뜻대로 상륙할 수 없었습니다. 원정군은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서쪽의 히라도(平戶) 방면으로 이동했고, 이키 섬은 일본군에게 빼앗겼습니다. 고려군은 제대로 싸우기는커녕 몽골군을 따라 현해탄 바다 위를 이리저리, 그저 끌려다니고 있었습니다.
원정군 함대가 히라도로 가기 위해 다카시마(鷹島) 앞바다를 지나는데, 점점 날씨가 사나워지더니 폭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태풍을 만난 것입니다. 대양을 건너온 강남의 전함도 자연의 무시무시한 힘 앞에서는 가랑잎처럼 휩쓸려 다니다가 뒤집히거나 좌초되거나, 혹은 서로 부딪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원나라 지휘관들은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철수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나마 고려의 배들은 어느 정도 귀환할 수 있었지만, 원나라와 강남의 배들은 거의 다 파손되고 말았습니다. 긴 시간이 지나 2011년, 다카시마 해안에서는 침몰된 원나라 선박들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원정은 실패하고, 남겨진 수많은 사람들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초창기에 육지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폭풍 때 물에 빠졌다가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포로의 구성도 다양해서 몽골 사람도 있고, 몽골 지배 하의 중국 북쪽 지역에서 살던 한족도 있고, 고려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강남군으로 건너온 남송 사람도 있었습니다. 남송은 끝까지 원나라에 저항하다가 막 정복된 참이라 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원나라의 강요로 먼 길을 출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간 남송 상인들이 하카타에 거점을 두고 꾸준히 교역을 해왔으므로, 일본인들도 그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몽골인이나 고려인 포로들은 대부분 목을 베었지만 남송 포로들은 살려두고 대신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때 일본의 포로가 되었던 사람 중에는 현재 파주시에 해당하는 봉성현(峯城縣) 출신의 고려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혔으나 용케 죽지 않고 탈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도망하며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하카타에 있던 당방(唐房)으로 숨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몇 마디 아는 중국어를 총동원해서 남송 사람 행세를 했거나, 혹은 중간에 마음씨 좋은 일본 사람이 숨겨줬거나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당방은 송나라 상인들이 세운 차이나타운으로, 여기서 옛 남송의 항구도시 명주(明州)까지 상선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상선단의 우두머리를 강수(綱首)라고 합니다. 몇 년 전 원나라에 의해 남송이 멸망한 뒤에도, 당방에는 강수들을 중심으로 남송 출신의 상인과 선원들이 남아서 교역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났으니 당방도 곧 철수해야 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하카타의 당방에서는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섞여서 지냈으니, 고려인은 한동안 남송인 차림을 하고 거의 숨어 살다시피 해야 했을 겁니다. 그러다 이듬해가 되어, 고려인 생존자는 운 좋게도 여기서 명주까지 가는 상선을 얻어 탈 수 있었습니다. 아마 마음씨 좋은 선장을 만났나 봅니다. 고려인 입장에서는, 일본을 탈출해서 중국에 갈 수 있다면, 고향에도 돌아갈 길이 열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상선은 머나먼 바닷길을 건너 명주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에는 이곳을 경원(慶元)이라고 불렀는데, 세계 최대의 무역항 중 하나였습니다. 고려인도 갑판 위에서 명주를 바라보니, 입이 절로 떨 벌어졌습니다. 예성강 벽란도도, 합포 수군 기지도, 하카타 당방도 여기에 비하면 시골 포구에 불과했습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니, 시박사(市舶司)의 관리들이 화물을 조사하러 올라옵니다. 시박사는 항구와 관세를 관리하는 관청인데, 원나라가 이곳을 접수한 이후에도 경계가 삼엄해졌을 뿐 그 업무는 이어졌습니다. 고려인은 그들로부터 숨어보려 하였으나, 붙잡히고 맙니다. 관리가 선원들에게 이 수상한 사람이 누구냐고 호통을 칩니다. 상인은 일본 원정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고려인이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습니다. 관리는 고려인을 붙들어갑니다.
마침 명주에는 고려말을 할 줄 아는 통역관들이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고려 상인들이 배를 끌고 이곳에 와서 무역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인은 통역관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습니다. 관리들은 그를 잠시 어딘가에 연금해 두더니, 곧 항주(杭州: 남송의 옛 수도)에 있는 지방장관인 강절등처행중서성(江浙等處行中書省)의 승상을 만나게 해 줍니다. 승상은 사정을 듣더니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합니다.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고려인은 원나라 관리의 호송을 받으며 때로는 배를 타고, 때로는 육로로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천하의 도읍인 그곳에는, 원 제국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이 있었습니다.
노년의 황제는 그에게 자기소개를 시키더니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었는지 묻습니다. 작년 일본 원정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고려인을 보고 황제의 호기심이 발동했고, 아주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입니다. 고려인도 기억나는 대로 그간의 사정을 소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고려 출신의 원나라 관리가 옆에서 통역을 거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그가 일본에서 거의 죽었다 살아나 이곳까지 오게 된 사정을 듣고, 껄껄 웃더니 크게 칭찬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났다'는 뜻으로 '갱생(更生)'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백호(百戶)'라는 군관 벼슬에 임명하고 선물까지 주며 고려로 돌려보내주었습니다.
고려에 돌아온 갱생은 임금님, 즉 충렬왕을 만나 또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에 아마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털어놓은 모험담 혹은 고생담은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여생을 보내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고려사』 짧은 기록을 보고, 당시 동아시아 정황을 참고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써본 것입니다.
동정(東征) 당시 봉성현(峯城縣) 사람이 왜(倭)에게 잡혔다가 도망하여 원(元)의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더니, 황제가 갱생(更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백호(百戶) 벼슬을 주어 돌려보냈다.
- 『고려사』 권29 세가29 충렬왕 8년(1282)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