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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판 '마르탱 게르의 귀향'

일본에서 돌아온 영흥군과 그 후일담

by 정영현

고려 말 공민왕 시기인 1369년, 왕족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은 신돈(辛旽)이 역모죄로 유배되자 그에 연루되어 무릉도(武陵島), 즉 현재의 울릉도로 유배에 처해집니다. 그의 처 신씨가 신돈의 일족(누나 혹은 고모로 추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친 동해바다를 건너야 하는 유뱃길, 영흥군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나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1388년, 영흥군의 종적이 끊긴 지 19년이 지났고, 그 사이 세상도 바뀌었습니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자 우왕이 즉위했고, 이해에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잡더니 우왕을 폐위하고 그 아들 창왕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제 고려는 이성계의 천하였고, 고려 왕조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영흥군의 부인 신씨는 죽을 줄 알았던 남편이 일본에 표류하여 살아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신씨는 도당(都堂, 당시 최고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에 남편을 구출해 줄 것을 건의했습니다. 또 서너 차례나 자기 재산을 털어서 일본으로 가는 사신 편에 하인을 보내어 남편을 찾도록 했습니다.


1389년, 드디어 일본에 갔던 노비가 자기 주인이라며 한 남자를 데려옵니다. 그 사람은 영흥군과 생김새도 다르고 어리석은 데다 조상도 고향도 기억을 못 했다고 합니다. 이에 그가 영흥군이 맞는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신씨의 동생인 신극공 및 영흥군과 친분이 있는 박천상, 박가흥, 이숭인, 하륜 등의 관료들은 이 사람이 영흥군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부인 신씨는 일본에서 온 그 남자를 보더니 자기 남편이 맞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영흥군의 두 아들과 영흥군의 형인 승려 참수(旵髓), 그리고 고려 종실의 여러 인물들도 그가 영흥군이 맞다고 하였습니다.


신씨는 영흥군이 아니라고 주장한 박천상 등을 사헌부에 고발했습니다. 왕족을 능멸했다는 거지요. 사헌부는 영흥군이 가짜라고 주장한 이들을 무고죄로 옥에 잡아가두고 심문하였습니다.


영흥군의 사위인 이숭문은 영흥군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숭인의 아우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영흥군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다가, 고문을 당하더니 자기 장인이 맞다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영흥군은 진짜로 결정되었고, 무고죄를 저지른 박천상 등의 무리는 유배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중 이숭인은 이성계에게 구명요청을 하여 풀려났다가 다시 탄핵을 받고 경산으로 귀양을 갑니다. 심지어 그를 구하려 했던 권근까자 처벌을 받게 됩니다.


과연 일본에서 돌아온 영흥군은 진짜일까요? 이 남자는 영흥군과 외모도, 기억도 달랐다고 하니 아무래도 의심이 됩니다. 당시 고려는 왜구의 피해를 심하게 입고 있었고, 많은 사람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포로의 대부분은 노동력으로 쓸 수 있는 남자들이었는데, 혹시 이 남자도 그 많은 고려인 포로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만약 이 남자가 영흥군이 아니라면 왜 부인 신씨와 왕실의 인물들은 그를 진짜라고 주장했을까요? 어쩌면 꺼져가는 고려에서 왕족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이숭인이 유배를 가게 된 데에는 그와 정치적으로 다투고 있던 윤소종 등의 세력이 배후에 있었다고 하니, 정치적인 음모도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후일담을 조금 더 붙이겠습니다.


고려 말에 왜구를 물리치는 데 앞장선 무신 최운해의 부인 권씨는 성격이 포악하여 남편과 심하게 다투고 별거하다 영흥군 왕환에게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남편을 찾은 신씨가 그 사이 별세했었던 걸까요. 고려 시기는 재혼이 허용되던 분위기였습니다만, 위의 일 때문인지 사헌부로부터 취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1416년(태종 16) 어느 날 밤, 권씨는 자기가 괴롭히던 여종 둘에 의해 둔기로 살해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권씨가 살던 곳은 영흥군의 집이 아니라 최운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인 최윤복(최윤덕 장군의 형)의 집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들 최윤복과 그 부인 송씨(즉 권씨의 며느리)도 취조를 받았다가 무죄로 풀려나게 됩니다.


중간 과정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일로 인해 권씨는 남편 영흥군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게 아니라 자기 아들의 집에 의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되지 않은 1392년(태조 1)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군(곧 폐위된 공양왕)을 원주로 귀양보냅니다. 이어 고려 왕족들도 강화도와 거제도 등 섬에 강제 수용됩니다. 고려 부흥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벌어지자, 1394년(태조 3) 3월에는 공양군(곧 폐위된 공양왕) 부자를 삼척으로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4월, 삼척에 있는 공양왕 부자를 죽이고 강화, 거제에 있는 모든 왕씨들을 모두 물에 빠뜨리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왕씨 숙청', '왕씨 학살' 등으로 불리는 사건입니다.


조선에서 세운 고려 왕조의 사당, 연천 숭의전.


영흥군의 최후는 따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 여기에 연루되어 원통한 죽음을 맞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일본에서 돌아온 영흥군이 가짜라면, 이 남자는 5년 정도 팔자에 없는 영화를 누리다가 뜻밖의 죽음을 맞은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흥군이 죽은 후 권씨의 신변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녀의 전남편 최운해는 1404년(태종 4)까지 살았으니 이 숙청 사건로부터 10년을 더 산 셈입니다. 애들 엄마인 권씨가 졸지에 과부가 되자 최운해가 너그러이 자기 집에 거두어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최운해가 죽은 후에 아들 최윤복이 딱하게 사는 어머니를 모셔와서 같이 살았는지도 모르죠. 어찌되었건 그 최후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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