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때의 기상이변
조선 태종 시기, 여름철인 음력 4~6월 서리가 내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른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것인데, 아마 기상이변으로 여름철에 기온이 떨어진 탓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시기에 라니냐가 자주 있었던 걸까요? 14세기말에 기온이 한랭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일까요? 혹은 다른 것을 서리로 착각했을까요?
뉴스를 검색해보니 비교적 최근인 2010년에도 6월에 대관령에 서리가 내린 적이 있습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753307
지금도 기상이변의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고, 하나의 기상현상을 놓고도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곤 합니다. 그래도 과학의 발달로 지구온난화라거나 엘니뇨·라니냐 등의 모델이 제시되어 있지요.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저 괴이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옛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원인을 찾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이라거나, 귀신의 소행이라거나 뭐 그런 겁니다. 지난번 글에서 적조현상이 벌어졌을 때 해괴제를 올린 것도 그런 이유였지요.
아래는 그 예시로, 태종 시기 여름에 서리가 내린 것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 아래에 이 글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재밌는 정보를 좀 실어보았습니다.
(한 여름에) 서리가 내리니, 왕이 말했다.
"내가 왕위에 오른 후 여름에 자주 서리가 내리고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니, 그 원인을 고민해 보았다. 옛 경전을 뒤져 보니 여름철에 서리가 오는 것은 형벌을 행할 때 사정을 잘 살피지 못해서라고 한다."
이에 6조 및 대간을 불러 말했다.
"죄인을 신문하며 매질을 할 때 중도(中道)를 잃으면 여름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니, 경들은 각자 이를 참작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내가 양 무제(梁武帝)와 같이 밀가루로 동물을 반죽하여 희생제를 지내겠는가? 이전의 사례를 참고하여 형벌을 집행하라."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재지변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서리가 내리는 것은 곧 임금이 형벌을 쓸 때 중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진산부원군 하륜(河崙)이 재상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천재지변을 그의 탓으로 돌렸는데, 재상을 교체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것은 재상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 아들(세자)이 재주가 없어 양위할 수도 없고 자살할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으니 마음이 아프도다."
이어 말했다.
"올해 가뭄이 드니, 경복궁의 행랑 지붕 수리를 마친 후에는 요역을 정지하라."
이어 대간의 요청으로 사청(射廳)을 확장하는 작업도 그만두게 하였다.
- 『태종실록』 17년(1417)년 음력 5월 9일
요새도 간혹 속설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라고 하는데, 옛 동양 고전에서는 임금이 형벌을 행할 때 중도를 지키지 못하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형벌에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너무 엄하게 하지도 않고 너무 너그럽게 하지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조는 6조 판서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으로 치면 각부 장관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태종 시기는 왕이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6조의 판서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대간은 당시 관리와 왕의 잘못을 살피는 일을 맡은 사헌부(대관)와 사간원(간관)과 두 관청의 관료를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모여 내각회의를 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양 무제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황제입니다. 남북조시대는 5~6세기, 중국 땅이 남북으로 나뉘어 2개의 왕조가 함께 존재했던 시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북쪽에 있는 왕조는 북조, 남쪽에 있는 왕조는 남조라고 하며, 남북 각각 몇 차례에 걸쳐 왕조가 교체됩니다.
이 중 양(梁) 나라는 남조에 해당하는 국가로 6세기 초에 존재했습니다. 무제는 양나라의 건국자인데, 독실한 불교신자로 살생을 금지하였고 달마대사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무제가 짐승 대신 밀가루 반죽으로 희생을 삼았다는 것은 불교식 제사를 올렸다는 뜻인데, 태종은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에 있었으니, 이변이 있다고 해서 불교식 제사를 올리고 싶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하륜은 고려 말의 권문세가 출신이지만 신진사대부에 섞여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인물 중 하나입니다. 민간의 평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재상이었을 당시 각종 국가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는데, 아마 거기 대한 민간의 반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태종이 먹을 욕을 하륜이 대신 받은 부분도 상당한 것 같습니다. 태종이 그의 탓이 아니고 자기 탓이라며 감싸주는 것 같지만, 실제 자기 탓인 부분도 상당할 거라는 거죠.
태종이 자기 탓을 하면서 세자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고 하는데, 당시의 세자가 바로 후에 양녕대군으로 불리는 이제(李禔)입니다. 이때 이미 세자가 눈밖에 난 상황인 것이죠. 실제로 이듬해인 1418년 6월에 태종은 세자를 충녕대군 이도(李祹)로 교체하고, 폐세자는 양녕대군으로 강등합니다. 그리고 2달 만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니, 바로 세종대왕인 것이죠.
이어서 또 다른 자연재해인 가뭄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시 가뭄이 드는 이유는 토목사업을 일으킨 탓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궁궐과 관청의 수리공사를 정지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언급되고 있는 사청(射廳)은 임금이 교외로 사냥을 나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입니다. 태종이 사냥을 좋아한 것은 아마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말에서 떨어진 것도, 기록에 남기지 말라고 한 것도...
어찌 되었건, 15세기 초의 상황에서도 자연재해가 닥치면 그 나름의 원인을 찾아 그것을 바로잡음으로써 상황을 타개해 보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기상현상의 원인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예측을 할 수 있는 시기에도 재해의 원인을 사전에 차단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전근대 상황의 노력이 헛되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위정자로서 손 놓고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창밖에는 장맛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나라에서도 진인사 대천명의 의지를 보여주었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