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을까?
근래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2026)라는 영화가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영월에 유배당한 단종(노산군)과, 현지에서 단종을 보필하고 단종이 죽은 몰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결국 이 사건의 원흉은 세조인데,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후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수많은 대신과 혈족들을 죽음에 몰아넣지요. 이전에 대히트한 영화 〈관상〉(2013)에서는 이정재 배우가 수양대군으로 분하여 잔혹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선보인 적이 있었는데, 이번 〈왕사남〉에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군요.
듣자 하니 세조와 안평대군 형제를 다룬 다룬 〈몽유도원도〉라는 영화도 개봉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남길 배우가 세조를, 박보검 배우가 안평대군 역할을 맡는다고 합니다. 제가 섣불리 예상해 보자면, 이 영화 속 형제의 관계는 『삼국지』에서 조조의 아들 조비와 조식 형제의 구도를 따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권력에 미친' 형이 '유약한 문인(文人)'인 아우를 의심하여 핍박하는 거지요. 조식이 조비 앞에서 눈물을 떨구며 「자두시(煮豆詩)」를 읊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박보검 배우의 야심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얼굴을 생각하면, 안평대군이 형 세조 앞에 엎드려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형제간의 우애를 호소하는 장면이 저절로 상상됩니다.
(※ 조비는 조식을 죽이지 않았지만, 세조는 결국 안평대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지요. 이걸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세종의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인 안평대군은, 그의 큰아버지인 양녕대군과 함께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고, 시와 그림에도 능했으며, 예술애호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안평대군은 수많은 학자나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미술품을 수집했습니다. 그의 인맥을 보면, 신숙주·박팽년·성삼문·이개·최항 등 집현전 출신의 학자, 문인화가인 강희안·강희맹 형제, 심지어 점술가인 지화 같은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 시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견(安堅)도 안평대군의 주요 인맥입니다. 안평대군은 본인이 비싼 돈을 주고 수집한 명화들을 안견에게 보여주어 그림 실력을 갈고닦도록 도왔습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명화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본 풍경을 안견에게 말해주어 그리도록 한 것입니다. 아마 영화에서는 과거 형제간의 즐거웠던 시절을 그 그림에 빗대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안견에게 그려달라고 한 그림은 또 있습니다. 현재 전하지는 않습니다만, 안평대군은 25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대략 1442년(세종 24)에 안견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7년 후, 그러니까 1449년(세종 31)에는 신숙주에게 부탁하여 안견이 그린 자기 초상화에 부칠 만한, 자신의 학문을 경계하는 내용의 글을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참고로 신숙주는 안평대군보다 1살 많은 거의 동년배로, 집현전 시절 안평대군과 깊은 친분을 쌓은 사이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4년 전인 1445년(세종 27) 신숙주는 안평대군이 수집한 그림을 보고 「화기(畵記)」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안평대군의 부탁에 신숙주는 다소 난처해하면서도, 초상화에 부치는 글을 써줍니다. 그 제목은 「비해당진찬(匪懈堂眞贊)」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비해당(匪懈堂)'은 안평대군의 호이고, '진(眞)'은 초상화, '찬(贊)'은 찬탄하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겠습니다.
안평대군께서 자신의 초상화를 나에게 보여주며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임술년(1442)에 내 나이 25살이었는데, 안견에게 나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네. 지금 7년이 지났는데, 그 모습은 이미 달라졌으나, 학문이 날로 늘지는 못하였네. 그러니 나를 위해 글을 적어주면 장차 후일의 법도로 삼겠네.”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공자가 15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學], 30살에 자립하였고[而立], 30살에 의혹이 사라졌으며[不惑], 50살에 천명을 알았고[知天命], 60살에 듣는 바가 거슬리지 않았고[耳順], 70살에는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구애됨이 없었다[從心]고 들었다. 무릇 군자의 학문은 마땅히 그 순서에 따라야 하니, 결코 건너뛰지 말고 나아가야 하고 또한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은 무거워지니, 무릇 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수양해야 한다. 일취월장하면 덕이 완성되고 도가 원숙해질 것이다. 그런 후에 반점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듬성거리는 초상화를 다시 만들어 나로 하여금 덕과 도를 찬송하는 글을 쓰게 하신다면, 또한 행복하지 않겠는가. 임시로 글을 남겨 삼가 찬시를 바친다.
英姿絶世 器宇夐峻 維粹維盎.
늠름한 자태는 세상에 빼어나고
기량은 아득히 높으니
오직 순수하고 충만하다.
乃德之潤 維年之芳 維力之強.
덕은 윤택하고
나이는 꽃다우며
힘은 굳세도다.
願言不息 天行是式 永膺多福.
원컨대 쉬지 말고
천체의 운행을 법도로 삼으면
오래 많은 복을 누리리라.
- 『보한재집(保閑齋集)』 권16 「비해당진찬(匪懈堂眞贊)」
요컨대, '더 연륜이 쌓이고 학문을 성취한 후에 초상화를 그려 글을 부탁하면 기꺼이 들어 드리겠다, 학문에 정진하시라, 이건 임시로 써드리는 글이다.' 이런 뜻입니다. 신숙주는 안평대군이 아직 초상화를 그리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시 이렇게 젊은 나이에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겠지요.
사실 안평대군쯤 되니까 최고의 화가인 안견을 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할 수 있었던 거지, 양반 사족이라도 여간 출세해서는 초상화를 남기기가 힘듭니다. 안평대군은 왕도 왕세자도 아닌, 일개 대군의 입장이니, 25살짜리가 초상화를 그린다는 건 어쩌면 분에 넘친 행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숙주는 이 글을 통해 안평대군에게 얼굴에 검버섯이 나고 흰머리가 난 후에 초상화를 그려도 늦지 않았다고 충고합니다. 1살 많은 형이 분에 맞지 않는 초상화를 자랑하는 동생을 좋은 말로 타이르는 거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의 노년기를 그린 초상화는 영영 그려지지 못하고 맙니다.
신숙주가 이 글을 쓴 이듬해에 세종대왕이 승하하였고, 이어서 왕위에 오른 문종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1452년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 단종의 측근 대신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습니다. 안평대군도 이에 연루되어 역모죄를 쓰고 강화도·교동도로 귀양을 갔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맙니다. 신숙주가 「비해당진찬」을 써준 후 고작 4년이 지났을 무렵의 일입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평대군의 측근인 성삼문·박팽년·이개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들은 '사육신(死六臣)'에 포함되는 인물입니다. 점술가 지화는 안평대군에게 '왕이 될 운세'라고 점괘를 읽어주었던 게 발각되어 결국 참형에 처해집니다.(영화 『관상』의 주인공 김내경의 모티브일까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몽유도원도」와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려준 안견도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고초를 겪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안평대군의 거처에서 비싼 먹을 훔친 게 발각되었고, 그로 인해 역모에 동조한 혐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안평대군에게 「화기」·「비해당진찬」을 써준 신숙주는, 아시다시피 계유정난에서 세조 편에 섰고, 이후 훈구공신으로 출세를 거듭하여 성종 때까지 활약합니다. 신숙주는 관료생활을 하며 국가에 대해 큰 공로를 쌓았음도 불구하고, 변절자·배신자의 오명을 씻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변절자가 된 신숙주의 「화기」를 통해 안평대군의 심미안이 전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화기」와 「비해당진찬」 두 글은 신숙주 사후 그 아들들이 편찬한 문집 『보한재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신숙주는 안평대군이 그렇게 죽은 후에도 글을 보관하고 있었나 봅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안평대군이 유약한 글쟁이 같은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형 세조처럼 무골은 아니지만, 영민하고 쾌활하고 호방한 성격의 젊은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안견에게 초상화를 부탁한 것만 보아도, 자유분방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많은 문인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고 있었으니, '안평대군파'를 이끄는 수장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안평대군에게 대권을 노리는 야심이 있었을까요? 안견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은 그의 야심이 은연중에 표현된 것이었을까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예상컨대 박보검의 안평대군은 야심이 없는 쪽일 것 같아요.)
만약 그에게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면, 왜 그는 젊은 나이에 초상화를 그려 자기 얼굴을 남겨둔 것일까요? 어쩌면 그저, 나중에 나이가 들었을 때 보기 위해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남겨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나르시시스트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상상을 하니 문득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떠오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