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수동성은 자연의 본성'이라는 편견을 깨다.
루시 쿡(Lucy Cooke)/조은영 역, 『암컷들 Bitch』, 웅진지식하우스, 2023
이 책은 동물의 생태와 진화 속에서 그간 오해되어 왔던 여성의 역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다.
19세기 초 찰스 다윈이 제시한 진화론(Darwinism)은, 동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한참 넘어서는 진보적인 면모들이 많았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을 동력으로 한 진화론은 상당히 혁신적이어서, 심지어 그 후속세대의 사고방식이 더 보수적이거나 혹은 반동적일 정도였다. 하지만 다윈은 결국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성 역할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 틀 밖에 있는 관측결과를 공개하기 꺼렸다.
이후 근대적인 진화생물학 연구가 진행되면서 기존 사고의 틀을 깨는 수많은 발견들이 이어졌고,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드는 데에도 일조해 왔다. 하지만 (적어도 20세기까지) 진화생물학계를 이끌어온 것은 서구 남성학자들이었고, 그들은 기존의 모든 고정관념을 부정하면서도 끝끝내 '여성의 수동성'에 대한 강고한 편견은 타파하지 못하였다.
이 책에서는 비교적 근래의 연구성과를 통해 '여성은 수동적이며, 성 역할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일침을 가한다. 동물의 진화와 생태는 유전자와 본능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사회적 혹은 문화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단계의 요소까지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암컷들은 수컷 이상으로 능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무리를 이루는 동물 암컷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화합하면서 권력을 쟁취하고, 또 지혜로운 리더십, 혹은 폭력을 통해 그 권력을 유지한다. 서열화된 사회 구조 내에서 전략을 구상한다. 암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에 가장 효과적인 배우자를 선택하고 가족 관계를 이루어 나간다. 또한 성욕을 숨기지 않으며,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애쓴다. 모성은 여성에게 지워진 숙명이 아니고, 안드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은 남성만의 도구가 아니다. 심지어 성별과 젠더를 암수(남녀)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게 과연 옳은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대로 암컷을 동물의 기본값으로 놓고 생각하면, 수컷들의 경쟁과 권력은 다소 우스운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남성은 여성이 다른 여성과 맺어지기 위한 유전자 전달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유전자 교류를 잇는 게 남성의 역할이 아닐까? 남성은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에게 발사되는 ‘유전자 다트(dart)’ 형태로 존재했어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양육이 필요한 자식의 형태로 만들어졌고, 밥값을 하기 위해 테스토스테론의 영향을 잔뜩 받아 우락부락한 싸움꾼 역할을 하게 된 게 아닐까? 그리고 여성이 싸움꾼 역할까지 하는 동물들의 사회에서 남성들은 무리 경계에서 겉돌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방송제작자로, 생물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고 있다. 그는 저널리스트의 능력을 발휘하여 이런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가고 있다. 진화생물학의 최첨단에 있는 학자들에 이끌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는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이 책은 심지어 '감사의 말'조차 흥미롭다. 조은영 번역가는 생물학 전공자로, 이전에도 루시 쿡의 책(『오해의 동물원』, 곰출판, 2018)을 번역한 적이 있다. 작가의 재치 있는 표현을 감각적으로 잘 캐치한 훌륭한 번역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이어서 읽고 싶은 책은 이수지의 『자연스럽다는 말』(사이언스북스, 2025)이다. 두 책은 공유하는 시사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수지의 책을 먼저 읽고 싶었지만 e북 출간이 늦어지고 있는 관계로 크레마클럽으로 서비스되고 있는 루시 쿡의 책을 읽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