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라떼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저녁바람 Dec 18. 2021

나의 외할머니 이옥진

내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 이옥진 여사 하늘나라 가시는 길 배웅하고 돌아왔다. 구순의 연세에 마지막 4년 여의 시간은 치매환자로 요양원에 계셨더랬다. 엄마는 많이 울진 않으셨다. 슬픔을 꾸역꾸역 삼키고 드러내지 않는 당신의 오랜 습관 탓일거다. 입관식때 혹여 쓰러지실까 어깨를 잡았는데,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이, 아릿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와 왈칵 눈물이 났다.


친척도 없고 코로나 시국이라 가까운 지인 외에는 부고장도 보내지 않아 빈소는 한산했다. 문상객들이 돌아가고 더더욱 고요해진 마지막 밤. 국화꽃에 둘러싸인 영정을 지키며 엄마에게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단편적인 내용들 뿐이지만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본다.



이옥진 할머니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후손으로, 경남 거제에서 1929년에 태어났다.

서류상 1929년생이지만 원래는 1935년생으로 육이오 전쟁때 서류가 불타서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어찌저찌 1929년생으로 살게 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마산 어디 동사무소 종이서류에는 35년생 미혼의 이옥진이 있다 한다.


친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재혼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부잣집에 입양보내진다. 그러나 비단 옷을 입고 이쁨을 받았어도 집에 가고 싶다고 허구헌날 우는 통에 파양당하고만다. 이후 친척집에 얹혀 살며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거의 식모처럼  살았다한다. 외할머니는 글씨를 몰랐다. 배우지 못해 그런가 싶어 엄마가 아무리 가르쳐드리려해도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난독증이었다고.. 그걸 모르고 왜 알려줘도 모르냐고 타박을 했다며, 엄만 또 목이 메였다.




전쟁통에 피난온 부산에서 중매로 결혼하게 되는데 남편(나의 외할아버지)은 이북사람으로, 육이오 전쟁이 발발하고 1.4후퇴때 남으로 내려온 사람이었다. 사실 북한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있었지만 전후 이러한 케이스는 흔했다. 외할아버지는 미니버스 전문 자동차정비기술자였는데, 정비회사를 차려 자리를 잡고 돈도 잘 벌어 엄마와 큰외삼촌은 부산에서 매우 부유한 유아기를 보냈다.


어릴적 집에 전화번호부만큼 두껍고 영어로 된 자동차 정비에 관한 책이 있었는데 버리지 말고 갖고 있을걸, 하고 엄만 아쉬워했다. 어른들 얘기 중 어렵던 시절과 더불어 부자였다던 시절 얘기를 100% 믿을 수는 없지만, 엄마 돌잔치엔 손가락마다 금가락지를 꼈었고 사진에서처럼 늘 국제시장에서 산 양장과 구두를 풀착장했다고.



엄마가 4살쯤 되던 때 외할아버지는 사업을 확장하겠다며 홀로 서울로 올라가버린다. 외할머니는 집에 3차례 도둑이 드는 등 부침이 심해 안되겠다 싶어 서울 간 남편을 찾아간다. 그런데 웬걸, 남편은 서울에서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분노한 그녀는 일단 엄마를 서울집에 놓고 부산에 돌아갔다.


아예 살림을 정리하고 올라온 날, 서울집 살림을 다 때려부시고 바람난 여편네를 내쫓는다. (이렇게 파이팅 넘치는 분이었다니!) 엄마는 서울집에 외할머니가 돌아오던 그 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지방에 앉아 있었는데, 외할머니가 저기서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게 보여 부산사투리로 '호순이(울엄마 이름)엄마 왔네!' 라고 했던 게 생각난단다.


막내외삼촌이 고3 학력고사를 한달 여 앞둔 어느날 외할아버지는 간경화로 돌아가신다. 엄마는 연락을 받고 나를 업고 언니 손을 잡고 병원에 갔다고 회상했다. 요즘같지 않게 40년 전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마친 후 유골을 사람손으로 직접 절구에 넣어 빻아주었다 한다. 외할머니는 연신, 불쌍한 내 남편 잘 부탁한다며 분골하는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었다고.



어느 집이든 남에게 말 못할 가정사는 있는 법, 엄마라는 이름은 그리움과 사랑보단  미안함과 책임으로 덮여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고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고 삼촌도 엄마도 외숙모도 사돈들도 계속 불쌍하다 한다. 하지만 난 불쌍한 외할머니로 기억하고싶지 않다.


시골 할머니라기보단 도시 여자였던 외할머니. 당신은 늘 향기나는 것들을 좋아하셨다. 화장을 열심히 하셨고 정신을 놓으실 즈음에도 화장품 파우치를 소중하게 챙기셨다. 아들은 그러한 취향을 기억하고 다른건 몰라도 영정을 꾸미는 꽃장식엔 많은 돈을 들였다.




한 줌, 한 줌의 재.


부침이 많았던 이승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한 줌의 재가 되어 하늘로 자연으로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이옥진. 고통없는 그 곳에서, 자유롭고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