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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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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바람 Feb 14. 2022

우리의 아름다운 식탁

결혼 전 나의 책상이었던 낡은 나무 테이블. 방 크기 에 맞춰 맞춤 제작을 했기 때문에 보통의 책상보다 폭이 10센티미터 가량 좁다. 결혼하면서 식탁으로 쓰다가, 넓은 집으로 이사가면서 다시 서재의 책상으로 쓰고, 또 시댁으로 합가 하면서 초등학교 들어간 딸아이의 첫 책상으로 쓰다가 이제 다시 식탁으로 쓰고 있다. 무려 18년째다. ​

처음 나에게 온 날. 책상으로서의 1일
신혼집 식탁으로 예쁜 옷(?) 입고
딸아이의 첫 책상으로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았다. 남편의 장사는 새벽에 끝났고, 난 출퇴근 왕복 100킬로미터를 견디는 워킹맘이었다. 어린 딸아이는 늘 시어머님댁에서 기다림에 지쳐 잠들었다. 함께였지만 외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지난 날이 어찌 되었든, 지금은 세 식구가 저녁 7시만 되면 이 식탁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


텔레비젼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식탁 위에는 반찬가게서 갓 사온(?) 닭볶음탕과 겉저리 그리고 참이슬 빨갱이. 퇴근길에 라디오를 듣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제쓰로툴의 '엘레지'가 나왔잖아. 갑자기 눈물이 났어. 당신 '엘레지' 알아? 그럼 알지. 왜몰라. 전영혁의 음악앨범 시그널이었잖아. 그걸 듣다 제쓰로툴을 찾아보고 빠져들었었지. 뉴스를 보던 딸이 뜬금없이 묻는다. 엄마 근데 왜 대치동에는 학원이 많아? ​


오늘 친구를 만나서 뭘 했는지, 학원에서 수학 선생님이 어떤 문제를 냈는데 황당했다든지, 그리고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에게 어떤 새 소식이 있는지, 늘 스마트폰을 붙들고 고개를 들지 않는 무심한 중2지만 이 때 만큼은 엄마 아빠를 보면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여유롭고 긴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정리하면 이젠 고양이 아들의 시간. 냉큼 식탁 위로 뛰어올라 그르렁거린다. 부드럽고, 포근하다. ​


식탁이 여기저기 패이고, 얼룩져서 지금 바로 대형 폐기물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낡은 건 사실이다. 의자는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매달 월급날이 다가오면,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커다란 6인용 식탁이나 유행하는 이케아 화이트 원형  테이블을 담아 놓는다. 새 식탁에 멋지게 세팅한 브런치 사진을 SNS에 올리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날은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다. 아직은 버릴 수가 없다. 나의 젊은 날이, 우리 아이의 어린 시절이, 그리고 우리 세 식구가 함께 한 저녁 시간이, 우리 가을이(고양이)가 털을 부빈 온기가, 이 식탁에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든 100년이 넘으면 혼이 깃든다는 얘기가 있던데.. 딸의 딸에게 물려준다면 다음 생에서는 이 식탁과 대화를 나누게 될 수도 있겠다. 엉뚱한 생각으로 마무리되는, 우리의 낡고 아름다운 식탁 이야기, 끝.

따로 또 같이. 옹기종기 앉아 각자의 취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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