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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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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바람 Jan 18. 2021

생일

마흔 셋이 시작되었다. 딸아이는 예쁜 손그림 카드를 써주고  남편은 새벽부터 일어나 소고기 미역국이며 불고기, 잡채를 만들어 생일상을 차려줬다. 가족, 친구들과 직장 동료에게 생일 축하와 선물도 받았다. 시어머님도 전화하셔서 생일 축하한다고, 다음에 오면 내가 좋아하는 북어 고추장구이 해 놓으신단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남편은 이미 코를 골고, 사춘기 딸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고양이 아들조차 잘자리를 찾아 침대로 올라간 밤시간. 먹다 남은 편의점 와인을 꺼내 홀짝이며 마흔 셋 생일을 마무리한다. 내일은 월요일이고 폭설예보에 출근걱정이 밀려오지만 그건 내일 눈 떠서 생각하자. 아직은 열 두시가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취해있고 싶다.

난 감정을 속이는데 능숙하다. 소리를 내지 않고 울거나 견디기 힘든 사람과도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필요하다면 싫어하는 음식을 권해도 좋아하는 척 잘 먹어보인다. 숙련된 '감정연기자'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늘 쉴새없이 마음을 다친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보이지만 실은 깊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고있는거다.

미워하는 마음은 독이 되어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멍하니 앉아 손톱의 가시를 뜯으며, 상상속에선 날 아프게한 그(또는 그녀)의 멱살을 잡는다. 사정없이 독하게 할퀴고 물어뜯는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에 지진이 난다. 이 모든 소용돌이를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뱉어내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분노와 우울에서 벗어나, 살고싶다.

대부분의 나는 이러하다. 불안하고 또 불안정하다. 한 걸음 내딛으면 천 길 낭떠러지가 있는 것처럼, 뒤돌면 심장을 빨아먹는 무시무시한 블랙홀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매일을 버티고 견디느라 피곤하고 피로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어쩐지 자유롭고 고요하며 가볍다. 어색하고 나른한 이 기분은..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래, 행복이냐? 아니, 취한 거야. 상관없다. 싸구려 와인의 맛처럼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테니까.

마흔 셋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남은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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