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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라떼의 맛

-르 클레지오와의 만남

by 저녁바람

대학생 때, 수업을 땡땡이 치고 르 클레지오를 만나러 갔다. 물론 수업을 땡땡이 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의 땡땡이에는 설레임과 간절함이 있었다. 프랑스 언론이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 이며 얼마 후 2008년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장 마리 귀스타프 르 클레지오와의 간담회. 남들이 가수나 영화배우 덕질할때 난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불어를 배웠다.

단순한 팬 사인회 정도로만 알았으나 실은 진지한 자리였다. 불문과 교수님들과 대학원생들은 불어로 질문을 했는데, 너무 길어서 질문 하나 하는데 오 분이 넘게 걸렸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화가 자장가처럼 들려 나른해지려던 찰나, 사회를 보던 교수님의 목소리가 귀에 번쩍했다. 자, 그럼 다른 질문은 없나요? 난 손을 들고 당당히 한국말로 물었다.


- 햇볕 좋은 날 잔디에 누워 꾸벅꾸벅 졸면서 난 당신의 소설 '황금물고기'의 주인공 여자아이, 흑인 소녀 라일라가 되어 파리 뒷골목을 누비는 꿈을 꿔요. 내게 그런 꿈을 꾸게 하는 책을 쓴 당신은, 어떤 꿈을 꾸나요?

금발의 파란눈, 미중년 아저씨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양말에 스포츠 샌들을 신었지만 그 부분조차 심장을 뛰게 했다.

- 어젯밤 꿈에 내 방 창가에 비둘기가 날아와 함께 가자고 했지요.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내가 물어본 '꿈' 은 어젯밤 자다가 꾼 꿈이 아니고 그가 꿈꾸는 미래, 그가 이루고자 하는 삶에 대해 물은 거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교수님이 통역을 안해주셨더라면 서로 무슨말을 했는지 알아듣지도 못했을테니까.

간담회가 끝나고, 책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연단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가져간 책은 '황금물고기'. 그는 책장 맨 앞에 '당신의 꿈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라고 적어주었다. 그 후 르 클레지오는 한국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서울이 배경이 되는'빛나' , 제주 해녀를 소재로 '폭풍우' 를 출간했다.

스물 한 살, 꿈도 희망도 없었던 때. 군용 담배를 빼돌려 파리의 뒷골목 삐갈거리 창녀와 이민자들에게 팔며 살면 어떨까, 군대서 휴가나온 친구녀석과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낄낄거렸더랬다. 내 꿈에 비둘기가 날아와 함께 가자 한다면 나는 그냥 따라가 버릴거예요. 이 말을 편지로 써 보내고 싶어 그해 가을학기에 교양불어를 수강했지만 D- 를 받았다.

실없는 농담을 실행에 옮겼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주말 밤이니까 술에 취해 몽셸미셸의 바닷가를 헤매고 있을수도 있겠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몸살을 앓는다. 잠들지 못하는 밤, 책장에 고이 모셔둔 '황금물고기'를 꺼내 첫 장을 넘겨 본다....

"s.w.Hong , 당신의 꿈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씌여있다고, 그 자리에 계시던 통번역대학원 교수님이 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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