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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i Jun 10. 2020

선택적 레이시즘

누구를 위한 인권운동인가?

#BlackLivesMatter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특히나 소셜미디어에는 며칠 전부터 너도나도 검은 배경 사진을 올리며 해당 문구를 태그하고 있다. 시작은 미국 경찰들의 범죄 진압과정에서 조지 플루이드가 사망하면서부터였다. 무릎으로 목을 압박, 제압하는 과정에서 (손목에는 이미 수갑이 채워져 저항할 수 없었다.) 용의자는 '숨을 쉴 수 없다' 반복적으로 호소했고, 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8분 여 간의 압박이 지속된 후, 조지 플루이드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아직도 많은 논란과 루머들이 뒤엉켜있다. 진압에 참여했던 경찰이 조지 플루이드와 일면식이 있는 사이고,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이다- 라는 '인종차별 여론'에 힘을 싣는 이야기와, 조지 플루이드의 전과 경력과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질식사가 아니었다며 '정당한 진압과정은 아니었지만, 영웅으로 추대될 만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지지하는 이야기 등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란을 뒤로하고, BlackLivesMatter 운동은 SNS를 타고 유행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서구권 나라의 참여도는 신속하고 단합력 있게 이루어졌다. 전국적인 시위행렬과 셀럽들의 기부가 이어졌다. 그 물결은 우리나라에도 닿아 얼마 전 관련 시위가 열렸고, 많은 스타들이 기부와 태그에 앞장섰다. 하지만 마냥 긍정적인 반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래퍼는 시류에 편승하듯  #BlackLivesMatter를 태그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다며 #AllLivesMatter를 태그 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밖에도 기타 커뮤니티와 기사, 댓글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유독 한국에서 (다른 아시아권 국가의 반응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조지 플루이드 사건, 흑인 인권운동에 관해 조금은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권운동이 그들만의 바운더리라는 의식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아시안들도 백인과 흑인에게 인종차별을 당해왔지만 누구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며, 이번 인권 운동 또한 'Racism'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Black Racism'에 반대하는 운동이기에 지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흑인 사망사건과 인권 문제을 논하는 자리에서 아시안이나 기타 인종 또한 '피해자'라 언급하는 것은 논점을 흐리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백인들이 원하는 것이다-' 라며 입을 막는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Divide and rule' 은 정치에서 아주 기본적이며 오래된 지배방식 중 하나이다. 이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치하려 할 때 피지배층 내부에 분열과 대립을 조장, 통일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통치에 유리하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누군가 '흑인 또한 아시안을 인종 차별해온 가해자이다!'라는 슬로건을 외친다면, 그렇게 새로운 운동을 일으킨다면, 최종적인 승기의 깃발은 아시안도 흑인도 아닌 백인에게 쥐어질 것이 자명하다.


그럼 왜 제목은 '선택적 레이시즘' 일까? 제목만 보면 이번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어그로는 아니다. 정말 이에 대해서 쓰고 싶어 고안한 제목이다. 다만 사전 설명이 없다면, 앞서 말한 Divide and rule에 의해 오해를 살 것이 뻔해 일종의 에어백처럼 구구절절 길게 서론을 써본 것이다.


본격적으로 (익명성에 빌어) 솔직한 의견을 말해보자면,


조지 플루이드 사건은 복합적인 원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조지 플루이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실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미국 경찰들의 불심검문, 체포 과정에서의 폭력성 등을 담은 바디캠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 범죄자는 언제나 죽일 수 있는 대상이다 (특히나 유색인종에 관해선). 경찰들의 Hands up!이라는 명령에 조금이라도 늦게 응하면 가차 없이 대응 사격이 이뤄진다. 용의자가 비무장 상태여도 말이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도 없는 일이다. 몇 년 전 방영한 '라이브'를 (경찰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보면 테이저건 하나를 쏘는 데에도 정당한 이유와, 특정 부위에 관한 정확한 조준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미국은 경찰의 공권력이 막강하다. 개인의 총기 소지가 가능한 점, 911 테러 이후 전반적인 경찰 공권력이 강화된 점 등을 미뤄볼 때,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그 정도와 행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공무집행 중 발생한 사살및 기타 행위에 대해 면책특권이 있기에, 조지 플루이드의 목을 8분 넘게 압박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브레이크가 없는 공권력은 본색을 숨긴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유색인종을 ‘적법하게’ 죽일 수 있는 티켓을 언제든 쥐어 줄 수 있다.


그 밖의 원인으로는 미국 내 인종 간 빈부격차와 교육률과 실업률, 임금의 차이 등 흑인들을 보다 쉽게 범죄의 길로 빠지게 하는 복잡 다양한 사회적 요소를 꼽을 수 있다. 한마디로 흑인 범죄자 조지 플루이드의 목을 압박해 사망에 이르게 한 백인 경찰관의 태연한 모습은, 현재의 미국을 아주 단편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하겠다.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한다.
그러나 약탈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수업시간에 흑인 노예제도와 해방운동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나 책들을 통해 어떠한 역사를 겪었는지 어렴풋 알 것이다. 빈번한 전쟁과 식민지 경험 등 '한'의 정서가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민족이 말살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그들에 아픔에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들의 역사와 투쟁은 아직 진행형일 뿐이다. 그러나 이번 시위와 함께 벌어진 약탈, 방화 및 기타 반달리즘에 의한 과격행위는 '투쟁의 방식'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오히려 불안정한 시국의 형세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범죄행위구별해야 맞다. 그것은 기존 인권운동의 정당성마저 해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열렬히 게시물을 올리는외국인 지인들과 친구들이 못마땅하다.


길지 않은 타국 생활이었지만, 현지인과 밀접하게 생활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심심치 않게 인종차별을 겪었다. 사실 내가 당한 것은 인종차별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무난했고, 그만큼 운이 좋았다. 그렇다고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이 타인종에 대한 차별보다 심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흑인, 중동, 라틴계 등이 아니기에 그들이 당하는 차별을 100% 이해할 수 없는 만큼, 그들도 우리가 당하는 차별의 정도를 멋대로 재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인종적 선입견을 벗어나고서도) 아시안들은 폭력적인 방법보다는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선호하거나, 내가 참고 말지- 식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많아 드러나지 않는 게 더 많다.


나의 경험에 의존해 말해보자면, 내가 당했던 인종차별은 대부분 무지(라 말하지만 무식함이라고 읽는)와 문제의식의 결여로 발생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외모를 칭찬하고자 '너는 다른 아시안들과 다르다. 보통 아시안은 눈이랑 이목구비가-(멍멍멍)'라는 망발을 (정말) 순수한 의도로 말한다거나, 사진을 찍을 때눈을 감았다고 무의식적으로 '아, 눈 감아버렸어, 아시안처럼 나왔네!' 라며 헤벌쭉 웃는 것들이다. 그외에도 '난 아시안을 구별할 수 없어. 내 눈엔 다 중국인처럼 보여.' 같은 전형적인 타입, '아시안 여자들은 다 착한 줄 알았는데' 같은 선입견에 의한 타입, 마지막으로 엄청난 무지함과 서양 우월주의가 합쳐진 '아시안들이 왜 하얗게 화장하고 염색을 하지? 백인처럼 보이고 싶은 건가?' 같은 것들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망언들이 수업이나 공식적인 사교활동 중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의식이 자체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인종차별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농담이나 단순한 희화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상을 흑인으로 바꾸어보자. 사진을 찍는데 그늘 때문에 얼굴이 어둡게 나왔다고 '흑인처럼 나왔어!'라고 한다거나 '흑인들은 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넌 아니네' '넌 다른 흑인들 하고 달리 완전 검은색은 아니네?' 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어떨까. 갑자기 분위기는 진지해진다. 학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리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의 상이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것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이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갈 때, 수많은 사상자가 보고 되었고 한동안 가파른 상승세를 유지했다. 당시 SNS에 올라온 인기 게시물이 모두 아시안을 조롱하거나 바이러스로 희화한 사진들이었다. 나의 외국 지인들 조차 문제의식이 결여된 게시물을 올리곤 했다. (영국에 퍼지지 않은 시점에서) 축구 경기를 보러 가서 마스크 모양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바이러스도 날 막을 순 없지!'라며 사진을 올린다거나, 마스크를 쓴 반 친구의 사진을 올리며 '너도 겁쟁이?' 라며 깔깔대는 사진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바이러스로 죽어간 동양인들에 대한 동정과 추모의 모습은 없었다.


이후 서구권으로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동양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행위와 범죄가 일어났지만, 역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간간히 뉴스를 통해 전해질뿐 그것을 태그 하거나 재업로드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랬던 친구와 지인들이 이번 흑인 인종차별 사건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업로드를 진행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넌 비겁한 범죄자'라며 강압적인 태도로 SNS를 검은색 화면으로 도배했다.


누군가는 말한다. 흑인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죽지만 적어도 아시안은 죽지는 않는다.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인종간 차별의 심각성을 정도화하여 인종차별운동에 우선순위와 등급을 매겨야한단 말인가? 내가 아는, 내가 믿는 인종차별 반대운동은 그러한 의식을 기조로 하지 않는다. Anti-racism 에는 흑인과 백인, 아시안, 중동-아랍, 라틴, 미원주민  기타 모든 인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맞다. 또한 이유와 형식을 막론하고 근절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인종간 차별을 두어서도 안된다.


SNS와 사회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흑인사회의 단합력이 부럽다.


'아시안도 차별당한다'는 댓글에 한 외국 네티즌이 말했다. '흑인이 차별을 위해 싸울 동안 아시안을 뭘 했는데?' 한번 보면 화가 날 댓글이지만, 두 번 보면 생각하게 되는 댓글이다. 우한을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을 당시, 많은 유학생들과 거주민들이 심경을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거기에 심심치 않게 들리는 말이 있었다. '우린 중국인도 아닌데... 아무래도 구분하기는 어려우니까.' '여기 애들이 그러는 거 (동양인 대상 차별행위) 이해는 해. 아무래도 자기들도 걸릴 까 봐 무서워서 그러겠지.' '아니 중국인도 아닌데 왜 저래 (이탈리아 마트에서 장을 보던 동남아인을 폭행하던 사건에 관해)'


흑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가정환경과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고액 연봉을 받으며 일하고 누구는 범죄의 소굴에 빠져 마약을 거래한다. 누구는 미국에 살지만 누구는 프랑스에 살고, 또한 누구는 한국에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지 플루이드 사건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타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일지라도 '인종'적 측면에서 기꺼이 뜻을 합치고 동참해 힘을 모은다. 그것이 언제든 자신을 타깃으로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안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렇게 못한다.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차이 등 아시안은 '하나'라는 생각보다는 각국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그렇기에 아시안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차별, 부당행위에 대해 하나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자는 의식 또한 낮다. 중국인 대상으로 벌어지는 Hate Crime이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아시안을 타깃으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지만, 끝내 부정하고 만다. '독특한 고유성'을 가진 우리를 중국인이나 일본인, 기타 동남아 국가 사람들과 구분 짓고 싶어 하는 의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시안 인종차별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 국적을 초월한 단합이 필수적이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서구사회에서 유색인종 차별에 경각심이 제일 낮은 대상이 아시안이다. 흑인, 중동, 라틴계 대한 차별적인 언행과 행동에 사회는 매우 민감한 태도를 취한다. (적어도 영국은 그랬다.) 표현 하나에도 신중하며 이슬람 문화권 학생을 존중해준다며 남녀 따로 팀을 짜주는 등 그 배려(?)가 대단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내야 할 대상은 조지 플루이드 사건의 시위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이다. 우리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부당함을 외쳐야 우리의 존재가 농담과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다른 인종임을 각인시킬 수 있다. 부족하지만 이 글이 그러한 의식을 가지는데 조심이나마 기여할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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