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색
어느 날 글을 쓰다가 알게 됐어.
내가 점점 더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말이야
전 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건 바로 가장 싫었던, 자꾸 더 오랜 시절로 점점 더 멀리 돌아가서 그토록 가장 싫었던 것들을 끝내 후벼 파고 또 산채로 꺼내는 것도 모자라 돋보기를 끼고 크게 확대시켜서 다시 하나하나 들여다봐야만이 지금의 내가 서서히 괜찮아진다는 것을 알았어.
괴로워서 눈물을 쏟아낼지라도, 불가의 상태가 되더라도 그 과정을 거쳐야만 마침내 지금의 육체와 정신이 같은 곳에 묶여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차피 그 어떤 것도 건너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
물로 다시 현재로 넘어오기까지 내 감정의 파도가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데 스티로폼 하나 떠있지 않은 그. 곳에서 맨몸으로 헤엄을 치고 있으면서도.
나는 가끔 네 생각이 나면 눈을 질끈 감아버릴 때가 많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그렇게 너를 꽁꽁 묶어 버린 건지 계기를 알면서도 또 틈만 나면 답이 없는 그 질문을, 답이 없는 너에게, 그리고 너에게 들리지 않게 반복하고 있어.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왔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이 단숨에 시끄러워지니까 그렇다면 그냥 이렇게 온 김에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의 질문으로 바뀌곤 해.
불행히도 우리는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세상을 바꾸고 악으로부터 구하는 멋진 영웅도 아닐뿐더러 세상을 바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을 맘껏 살아 낼 만큼의 자격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그 자격은 너도 알다시피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졌잖아.
우리는 정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릴 때 그림을 그려보지도 않으면서 이상하게 색연필이나 사인펜 같은 색이 정말 많은 도구들을 사는 것을 좋아했지. 그냥 그것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 같아.
그래서 이유를 모른 채 그런 느낌이 좋아서 온갖 색이 들어간 미술용품을 틈틈이 샀어. 사용은 하지 않으면서 같은 반에 그림을 잘 그려내고 그런 것들을 잘 활용해서 멋진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을 마냥 부러워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거야.
그런데 기회도 없었고 소질도 없었고. 다만 그림을 너무 그려보고 싶었던 사람.
본능적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자꾸 관심이 기울었던 것 같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은 동경이 되고 그 동경은 너무나 커지면 위험해져. 왜냐면 동경이 과해지면 자존감을 공격해. 그리고 이 상처에 대한 연고는 '결국 내가 직접 해보는 것' 밖에 없더라.
색깔을 보면 왜 내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를 몇 년에 걸쳐 고민해 봤어.
색연필들의 색에는 각자 고유한 이름이 있어. 신기할 정도로 색이 다양한데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더라.
그래서 나는 그 색연필들을 보면서 나도 세상에 필요한 어떠한 색일 거야. 세상을 칠하는 데는 여러 가지 색이 있어야 하는데, 나라는 사람도 필요한 색이니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름을 가지고서 내 자리를 차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 같아. 그래서 내가 색연필의 색깔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애틋했나 보다.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으니까 이 세상에 와서 이름이 있는 게 분명해. 자주 쓰는 색이 든 거의 손도 안대는 색이든 전부 그냥 다 이름이 있고 그 세트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어설픈 물건이 되어버리듯 이 세상도 내가 있어야 세트를 완성한다고 믿어.
주류이든 비주류이든 어쨌든 필요한 사람 중에 하나일 거라고 굳게 믿으니까 그럼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그 일이 무엇일까를 자문해.
그런데 아마 죽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 질문을 놓지 못할 거 같다. 나이가 들어가고 형태가 더 많이 잡히더라도 그 질문을 놓는 일은 없을 것 같아.
계속해서 무언가에 결핍되는 외로운 길을 택한 건 내 의도이고 의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야.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겠다며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것조차도 나의 일부 같아서.
그리고 너는 그런 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어.
듣지도 못하고 대답도 없는 너에게 나는 이런 말을 마음 안에서만 해.
이 편지를 보내지 않을 거라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보게 되면 이 이야기가 너의 것이라는 것을 들키게 되잖아. 그래도 이렇게 적어놓고 나면 한 줌 나아져 있는 나를 보게 돼.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지만 그토록 닮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야. 다짐 같기도 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그런 부류일 거야.
그래도 우리가 고유의 색깔을 지니고 있기에 여기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음 해서 너를 몰래 떠올리는 중이고 이렇게라도 너를 머릿속에 소환하고 나면 우리가 만난 것만 같아서 마음의 무게가 조금 덜어지는 것 같아.
이게 바로 내가 홀로 너를 추억하는 방법이고 내 마음을 조금 어떤 것에서 해방시키고 나아지게 하는 방식이 되었어.
그러니 너도 나처럼 너만의 이유를 반드시 찾아가며 스스로 납득하는 그런 해방의 날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