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by 창작몽상가

일단 너에게 고맙다는 말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아.


연락을 받지 않은 나에게 왜 사람을 겁나게 하느냐의 우려로 시작된 너의 음성메시지는 시작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차올라 있었어.


꼭 반드시 우리가 만나야 한다는 굳은 의지,

강요와 더불어 내가 보고 싶다는 그리움,

우리의 관계가 어떤 사이였는지에 대한 회상,

나에 대한 너의 마음이 어떤지 또 혹시 내가 어떤 일로든 조금 힘든 상황이라면 해결책을 주고 같이 고민해 줄 테니, 말만 해달라는 너의 목소리에는 늘 그렇듯이 진지함과 단호함, 신뢰가 담겼어.

정말인지 너에게 말만 하면 뭐든 해결해 줄 것 같은 막강한 힘이 느껴졌지.


그리고 부탁인데 이런 식으로 연락 끊으려고는 생각하지도 말라면서 끝에 제발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붙인 너는 왜 나에게 네가 다른 사람에겐 정말 잘하는

그 위엄과 자존심을 세우진 않았던 거야?


나를 그저 단순한 친구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알차게도 너의 최근 근황까지 꾹꾹 눌러 담은 1분 50초의 음성에는 나에 대한 애정, 네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까지도 들어 있어.


그리고 네가 얼마나 우리의 관계를, 한 인간과 엮어진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까지 담겨있더라.


나는 고맙다는 말과 동시에 미안하다는 말을 당연히 해야 하겠지.

내가 너의 연락을 일부러 피한 것은 절대 아니야.

다만 내가, 나라는 못난이가 말이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지치는 편이라서 관계를 자연스럽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보는 사이가 아닌 이상 항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에너지 충전이 필요한 사람이더라고.

그래서 별 이유도 아닌 이유들로 너의 허락 없이

나 자신에게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오는 연락들을 몇 번 피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


난 아무 일도 없고, 잘 지내고 있고 몇 가지 집중할 일이 있었을 뿐인데 마치 출가한 스님처럼 나만의 산속에 파묻혀 지낸 것. 그게 다야.


다시 말해 이건 너와 전혀 상관이 없는 회피였다는 거지.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법을 조금 잃어버렸어.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로워.

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해.


마트, 지하철, 길거리에서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에게 조잘조잘하고 있는 사람들을 있을 때 기회만 되면 나는 그것들을 노리고 필사적으로 엿들어.


도대체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걸까.

그것이 중요하든 시시콜콜한 내용이건 간에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왜 인간은 누군가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걸까.

왜 인간은 자신이 겪고, 자신이 본 일을 누군가에게 전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왜 인간은 자신이 알게 된 어떤 인간이 잘 있는지 생존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안심이 되는 ,

그렇다면 그다지 독립적이지는 못한 동물이라는 건데.


하지만 생명체 중에는 우리 인간이 가장 독립적이라며.

그렇다는 사실, 이론들이 개인적인 나만의 방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어.



사람들은 뭐가 이렇게까지 즐거워 보이고

반대로 뭐가 이렇게까지 심각해 보일까.


길을 가면서 들리는 말들을 주워 담아 엿들을 때 제일 나의 마음이 쓰이는 말이 뭔 줄 알아?


의외로 정말 단순한 '야~ 너무 오랜만인데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라는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들을 보면 이상하게도 살짝 스쳐가는 은은한 이질감 같은 게 있어.

그리고 나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그 이질감을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어.

어떤 날은 그 감정이 들어서 결국 나를 파괴해 버리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그냥 담담히 받아들여지게 되는 날도 있고.



그리고 곧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혹시 내가 보통의 인간들과는 또 다른 종일수도 있는 걸까? 말이 안 되긴 하는데 말이야.

왜냐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나와 정말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고,


나는 항상 어떤 테두리 밖에 있는 것 같은 건

왜일까?


나도 이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종.

바로 인간인데 ,

정말 무엇이 우리가 다른 종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만드는 걸까?



사람들의 의도, 심리가 궁금해져.

왜 어떤 사람이 잘 지내는지 반드시 알고 싶은 걸까?

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되는 걸까?

왜 그 사람에게 반드시 안부를 물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걸까?


어떤 관계를 도대체 어떻게 맺어야만

모두와 같이 타인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불행히도 점점 더 사람에 대한 집착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


집착 안에 애착이라는 게 있을 것 같아서,

애착이라고는 쓰고 싶지 않았어.

애착이 과해지면 집착이 되는 걸 테고 애착이라는 말은 나의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조금 약한 기운이 있어.


내가 말하는 집착이라는 것은 나쁜 의도가 있어서 물고 늘어지는 그런 추악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끈끈하고 강한 힘을 지닌 어떤 고귀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건데 , 그 감정이 나에게는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애착이라는 말 보다 더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집착이라는 말을 쓰고 싶어.


아무튼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좋은 방향에서) 집착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같다고 보고 있을 정도야.

그런 에너지는, 기운은 어디서 샘솟는 걸까?

그만큼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한 사람들이고 책임감과 의리를 지켜내는 멋진 사람들 같아.



나는 아무리 잘 맞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내가 정말 편하게 연락을 할 정도의 사이가 되기까지 수년이 걸려.

그리고 그렇게 다져진 관계 속에서도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하게 되면 또 겨우 가까워진 거리를 굳이 다시 벌려내고 있는 나를 발견해.


나 같은 사람들은 무해한 외향형 인간에게 간택되어야만 친구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유지된다는 우스개 소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인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더라고.


나는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도 없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들을 내가 느낀 후에야 마음을 열곤 해.

절대 밑 보이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내세워.

문제는 그 자존심을 굳이 지켜내서 내가 얻어 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팩트야.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이 어디선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면서 잘 지내겠지’라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해졌어.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 또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점점 줄어가면서 인간에게 집착해 봤자 남는 건 상처와 허무함, 공허함 정도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잘 지내?'라는 물음에 '응' 또는 '아니'가 나올 테고,

그다음엔 '너는?'이라고 하겠지.

이렇게 탁구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은 이 대화가 왜 중요할까?


그렇다고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그 시간에 안부를 주고받는 거.

왜 해야 하는 일일까?


사실 이렇게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또 그렇지 못해도 그런 척이라도 해내면서 보통의 다른 사람들처럼, 의젓하게 싫은 일도 꾹 참고 예의상이라도 해야 하는 일들을 해낼 자신도 용기도 없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마 내가 받는 벌은 그로 인해 생기는 고독함, 외로움, 인생의 허무함을 다른 이들 보다 조금 더 자주 느끼는 고통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런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솔직히 괴로워.

그래서 나 자신에게 그 괴로움에 걸맞은 집요한 괴롭힘이 시작되지.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난 걸까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엔 스스로가 유별나다는 방향으로 잠정 결론이 나고 일단 골치 아픈 생각은 잠시 멈춰.

이것 또한 내가 받는 벌일 거야.


인간들을 단순하고 평범하게 대하지 못하는 죄에 대한,

인간이면서 인간들에게 집착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관계 그리고 사랑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 것에 대한 벌.





지금도 나는 편지를 쓰면서 너를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름대로는 너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되게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청자여야 하는 너는 내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지.


그럼 네가 듣지 못하니까, 이것은 건강한 관계가 아닌 걸까?

그런데 내가 너에 대해 갖은 마음 다짐과 생각, 시간들은 확실히 존재했는데 말이지.


나는 그러한 시간의 존재성에서 의미를 찾고 있지,

사람과의 직접적인 관계성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인가 봐.

종이 인간인건 확실한데.

좀 달라.


하지만 확실 한 건 네가 그렇게 강력하게 나에게 내어 준 집착이 결국은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결론이 났어.


난 이 편지를 마치고 너에게 전화를 걸 거야.

그리고 네 목소리를 듣고, 모두가 하듯이, 아주 평범하게 '잘 지내? 어떻게 지냈어?'라고 말할 거야.


물론 이 말을 하기 전에 반드시 너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마음 다해 전할 예정이고.

이렇게 까지 사람을, 나라는 사람을 좋아해 주는 따뜻한 책임자 같은 네 재능 덕분에 나는 오늘 정말 평범한 저녁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참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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