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의 아이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싸워 가고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에 이어 난공불락의 성인 여리고성을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건을 여호수아 6장 마지막절까지 기록하고, 7장 1절이 시작하며 이스라엘의 범죄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수 7:1) 성경은 단순히 범죄한 자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지파를 언급합니다. 이는 그 한 사람의 범죄가 그의 아버지, 그의 할아버지, 그의 지파,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오염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오늘 아이성 점령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통해 죄의 속성에 대해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아이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 매우 작은 성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은 모든 백성이 달려들어도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아이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성을 정탐한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수 7:3)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는 자신들이 마치 메뚜기 처럼 보인다며 전쟁에 대해 비관적인 소식을 전했던 정탐꾼이 대부분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아이성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보고는 상당히 자신감이 넘치고 희망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듣고 백성 삼천을 아이성으로 올려 보냈고, 손 쓸 도리 없이 수십명이 빠르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큰 공포와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여리고성은 단 한명의 사상자 없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작고 약해 보이는 아이성에서는 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수십명의 전사자를 만들며 패배한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믿음의 속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볼 때 그들은 자기들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아이성을 바라볼 때는 오히려 상대의 약함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가나안 땅 앞에서는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그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가나안 땅에 입성한 것, 더 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은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의 믿음이 기초가 된 것입니다. 반대로 아이성과의 전투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기들이 가진 경험과 전력만을 의지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자신 가운데 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성급하게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입성은 의인 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성공했지만, 아이성과의 전투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해 비참한 실패를 맞이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율로 따지면, 대부분의 백성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두려움에 떨었던, 가나안 입성의 첫 관문이었던 여리고성에서는 패배를, 대부분의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고 담대했던 아이성에서는 승리를 얻어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첫째,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붙드셔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회개하지 않은 티끌만한 죄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으시고, 사랑의 책망과 채찍으로 그것을 다루시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진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의 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얼마나 큰 성을 만났는가”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작은 믿음이라도 있는지, 티끌 같은 죄라도 붙들고 있는지로 갈라지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큰일 앞에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들, 즉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는 마음을 겸손하게 두고 오랜 시간 기도하며 구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치루게 될 수능이나 임용고시 시험을 위해, 어떤 사람은 자신이 만나게 될 배우자를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나 사업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은 여리고성처럼 거대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보다, 아이성처럼 익숙하고 단순한 작은 사건들이 훨씬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작은 일 앞에서는 섣불리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앞세우다가 실패하는 전형적인 신앙의 패턴을 보여 준다는 데 있습니다. 즉, 여리고가 아니라, 아이성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리고성을 함락했다 하더라도, 아이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가나안땅 점령은 커녕 그 땅에서 멸망 당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가볍게 여기는 우리 삶의 모든 사건은 이러한 작은 아이성의 집합체 입니다. 이 개개의 사건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수 많은 여리고성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작은 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눅 16:10)고 하셨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선택,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생각과 말, 한 사람에게 건네는 작은 친절 하나, 내가 먼저 참는 아주 작은 인내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아이성 전투‘인 것입니다. 우리는 큰 사역, 큰 성공, 큰 기도 제목에는 민감하면서도, 오늘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가정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직장에서의 눈앞의 작은 유혹을 어떻게 지나치는지에는 너무 둔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큰 여리고‘에서 무엇을 했는가보다, 오늘 ‘작은 아이성’에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눈을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으로 돌립시다. 세상이 주목하는 큰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작은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지극히 작은 죄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삶, 그 삶이 결국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인생, 가나안 전역을 끝까지 완주하는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게 될 것입니다.
아이성에서 패배를 경험한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이전 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전 모세의 이스라엘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곧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왔느냐”하며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에서 패배를 경험한 여호수아와 장로들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수 7:6) 여기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썼다”는 것은 그들의 몸을 바닥으로 완전히 낮추었다는 것을, “저물도록 있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회개의 모습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 자체가 결국 이 전쟁의 패배가 단순한 전략 실패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그들이 인지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회개에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회개는 첫째,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쓰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는 온 몸을 주관하는 주인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머리에서 모든 생각과 판단, 그리고 전쟁을 위한 전략이 나옵니다. 겸손은 바로 그러한 머리를 땅 바닥에 낮추어 티끌을 뒤집어 쓰는 것, 즉 내가 가진 생각, 판단, 그리고 체면까지 모두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가 망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왕들이 자신들의 머리를 땅에 낮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 높일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과 마지막 왕을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자신의 죄가 어떠한지 들었을 때, 그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말해 달라 부정한 청탁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어떻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승리와 부흥을 예언한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청종하는 반면, 멸망을 말하는 참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협박해서 그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높이는 자는 결코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들며 모든 주변국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찾아왔을 때, 그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눈물의 회개를 하며 다시는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으려 몸부림쳤습니다. 이처럼 땅에 엎드리는 겸손함이 회개의 첫번째 핵심이라면, 두번째는 해가 저물도록 머무르는 끈질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고 그것에 대한 응답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과 대책을 섣불리 세워서는 안됩니다. 만약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울 왕이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 시간이 다 되어도 오지 않자,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제사의 형태만 있었을 뿐, 정작 제사에 필요한 순종이라는 본질은 빠져버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오히려 불순종이 된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거짓 교훈을 버리십시오. 아간이 왜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여호수아 7장 24절을 보면, 아간이 가진 것이 자신이 훔친 것 외에도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많은 자녀들과 많은 가축을 거느린 이스라엘의 유력자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이처럼 부족함이 없는 자였으나, 여리고성에 있는 모든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자신에게 남는 것이 없다는 불안감과 집안의 앞날을 준비하고자 하는 조급함이 결국 그 사달을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리고성의 모든 것은 그들이 점령한 첫번째 성이므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취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에서 탈취한 모든 물건과 가축은 모두 이스라엘이 취하게 해 주셨습니다. 즉, 때가 되면 필요한 것을 허락하고 주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이러한 우리의 계산과 조급함이 꺾여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기도는 매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빨리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멈춰 서서 기다리는 끈질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몇 년 뒤에 만나게 될 여리고성은 잠시 마음에서 지우십시오. 대신 오늘 당장 내 앞에 서 있는 아이성을 두고 기도하십시오. 그 보이지 않는 작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국 여러분의 삶을 지켜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