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타임라인안에서…
여러분은 보험에 많이 가입 하셨습니까? 저도 내년에 건강검진을 받아 볼 예정인데, 벌써부터 암에 걸리면 얼마나 나오는지 계산부터 해 봅니다. 내가 일을 얼마나 쉬어도 되는지, 치료를 부담없이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보험은 이처럼 내가 지출해야 하는 비용을 줄여주고, 추가적인 재정적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사실 나를 위한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보험 중 종신보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죽었을 때 돈을 받는 것입니다. 아니, 죽으면 천국으로 돈을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굳이 왜 이런 보험이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닌, 이 땅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신보험은 보통 자신이 잘 들지 않고 배우자가 추천합니다. 자신과 자기 자식이 살아있는 동안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죠. 우리에게는 이러한 습성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결과는 내 생에서 반드시 그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죠. 이는 우리의 믿음 생활에도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기대합니다. “하나님, 약속하셨다면 제 삶에서 그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조차 자신의 생애 안에서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 하지만 아브라함은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고 한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 11:13). 모세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광야 40년을 걸어오면서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처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의 아름다운 땅 그 좋은 산지와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 3:25)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 자신의 소망에 대한 간절함으로 하나님께 이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가나안의 아름다움을 보여는 주시지만, 그가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를 ‘정복자‘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늙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은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수 13:1) 즉, 가나안 땅 점령을 시작한 여호수아는 나이가 많아 늙을 때 까지 자신의 인생 사역인 가나안 땅 점령을 모두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세 사람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보았으나 다 누리지 못했고, 모세는 약속의 땅을 눈으로 보았으나 밟지는 못했고, 여호수아는 땅을 점령했으나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고 함께하며 많은 놀라운 일들을 이루었지만, 정작 그들의 삶에서 받은 거대한 비전이 그들의 눈 앞에서 이루지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 완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의 속성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비록 죄는 있었으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자리잡게 한 훌륭한 왕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에서 멈추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이스라엘은 제대로 된 하나님의 성전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회막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다윗은 자신은 좋은 집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 장막 안에 있다는 사실에 심적 불편함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성전을 짓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안정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부와 재산을 모았으며, 인적, 물적 자원도 풍성했습니다. 즉, 그는 성전을 지을 능력도 있었고, 열정도 있었으며, 모든 상황도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 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대상 22:8-9) 다윗에게 있어서 성전 건축은 자기 인생의 ‘클라이막스’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중요한 일을 다윗의 몫에서 한 발 빼 버리십니다. 결국 다윗은 성전을 지을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 모든 준비된 것을 물려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 배우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비전과 내가 이루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분명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윗의 마음 안에는 내 손으로 완성하고 싶은 인간적인 열망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 자신의 일이 아닌 것 처럼 보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적인 고백의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므로, 자신의 욕심과 열망을 감추기에 더더욱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서 조차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과 우리의 욕심을 구분해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 일을 넘겨준 것은, 하나님이 그 비전을 다윗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라, 그저 다윗의 세대에서 솔로몬의 세대로 옮긴 것입니다. 즉, 다윗이 맡은 일은 모든 일을 끝내는 ’완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참여하는 한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큰 전쟁이었던 가나안의 북부 전쟁에서도 비슷한 영적 원리가 드러납니다. 당시 북부에서 가장 강한 성읍을 가진 하솔 왕은 주변 북부 왕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 전쟁은 이제 정말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 수많은 말과 병거, 곧 그 시대를 지배하던 최첨단 전쟁 도구가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그들의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그들의 병거를 불살라 버리라.”(수 11:6)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이 전쟁 후에 가장 매력적인 전리품, 즉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수단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땅에서 취하는 모든 재물과 가축은 허락했지만, 전쟁을 위한 자산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필요한 필수품은 얻지만, 미래를 위한 전략은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뒷발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사르는 행위는 하나님의 비전에 내 욕망을 얹지 않겠다는 적극적 신앙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 갈등은 계속 반복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전히 돌릴 것인지, 아니면 그 비전에 편승해서 내 욕구를 이루는 도구로 삼을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하나님의 비전과 나의 욕심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그 분의 뜻을 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유력한 자가 되길 바라며, 또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가 비전에 속한 것인지, 욕심에 속한 것인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바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했던 것 처럼, 말의 힘줄과 병거를 태우라는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는 지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비전을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치인이 되면 오로지 국민과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그들이 목회자가 되면 주변의 이웃과 교회를 세우고 전 세계적 복음 사역에 온 힘을 쏟습니다. 그러나 입술로는 같은 기도를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비전에 편승하는 자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지닙니다. 그들이 정치인이 되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그들이 목회자가 되면 영혼을 돌보는 일보다 성도의 수와 헌금에 더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큰 것을 바라고 큰 것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믿음의 크기와 비례하므로, 그러한 비전을 품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우리의 욕심이 그 안에 편승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여호수아가 아니라, 그것을 어기고 좋은 것을 선택해 자신의 욕심을 채운 사울의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모세가, 그리고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비전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편승시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것을 점령하는 것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었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은 커녕 그 주변 나라조차 점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의 숙원을 직접 성취하고 눈으로 보진 못했으나,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으로 참여해 믿음으로 그 놀라운 성취를 맛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 안에서 완성되지 않고, 세대를 지나 이어집니다. 우리는 완성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잇는 통로입니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약속을 바라보고 웃었습니다. 모세는 요단강 건너 아름다운 땅을 바라보며 마음 깊이 들어가고 싶은 열망을 뒤로하고 자신의 뒷 세대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여호수아는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에는 얻을 땅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으며,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음에도 그 일을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맡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 한 걸음 전진했느냐. 빌립보서 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 완성하실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중간에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잠시 쓰임 받는 통로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모든 일을 계획합니다. 그들에게는 영생이 없으며, 큰 역사를 써 나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도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이 성취하지 못하는 것을 인생의 부족함과 회한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비록 내 인생 안에서 내가 꿈꾸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다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분의 선한 계획을 한 걸음 전진시키셨다면, 그것이 참 만족이 되고 감사함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심은 믿음의 씨앗이 자녀에게서 완전히 자라는 모습을 내 눈으로 다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흘린 눈물과 헌신이 내가 기대한 모습으로 가시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명이라고 믿고 달려온 길의 열매가 내 기준에는 절반밖에 안 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이 내가 이 땅에서 죽는 날까지 보지 못할 열매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내 인생 전”과 “내 인생 후”까지 이어진 하나의 긴 선입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저 그러한 거대한 역사 속에서 믿음의 작은 일을 감당하며 선한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동역자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모세가 없고, 모세가 없었다면 여호수아가 없고, 여호수아가 없었다면 다윗이 없고, 다윗이 없었다면 솔로몬의 성전도, 그리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한 지점에 서 있을 뿐입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처럼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며 시작하는 세대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여호수아처럼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싸우는 세대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다윗처럼 마지막 준비를 다 해 놓고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세대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역할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역할을 맡기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종했느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100년짜리 인생이 아닙니다. 옛날 스코틀랜드의 한 작은 마을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몇 년째 눈에 보이는 성장도, 새 신자도 거의 없었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나이가 많은 담임 목사님을 이제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건의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처럼 영적으로 매마른 상황 속에서도 위 바비라는 가난한 집의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말했습니다. 장로들은 그런 아이의 회심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회심을 한 가난한 집의 아이는 선교 집회에서 헌금 바구니가 자신에게 오자 그 바구니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드릴 돈은 없어요. 하지만 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그 위바비는 커서 선교자가 되었고, 기 후부터 사람들은 그를 로버트 마팻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 초기 7년 동안 단 한 명의 회심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프리카 남부에 머물며 한 부족의 언어로 성경 전체를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의 번역과 선교 사역은 이후 아프리카 복음화, 그리고 그의 사위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에게 이어지는 거대한 선교 흐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몇 년동안 단 한명의 회심 밖에 없었던 작은 시골 교회, 그리고 50년 동안 커다란 열매 하나 보지 못하고 오로지 성경 번역에 힘쓴 한 명의 선교사가 결국 아프리카 복음 사역의 거대한 기반이 된 것입니다
. 오늘 우리가 행하는 작은 순종과 믿음의 결심이 결국 후세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가진 직책의 크기에 속지 말고, 내가 행하는 작은 일에 순종하십시오. 결국 오늘 우리가 뿌린 작은 씨앗이 가나안 땅 점령이라는 큰 사건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