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랑

하나님의 격려

by Sue Park

참 사랑 (롬 8:34-39)


어릴적 연애하는 친구들을 보며 연애에 대한 마음을 일찌감치 접었다. 사귈 때는 없으면 죽을것 처럼 좋아하고 사랑하더니, 헤어지면 바로 상대방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 한 순간에 증오로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그럴 수 없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에게 이 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여겨질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이별은 이전에 했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솔로몬을 찾아온 두 여인을 보자. 한 아이를 두고 두 어머니가 자신의 자식임을 주장한다. 솔로몬이 어머니가 둘이니 자식을 둘로 나누어주라, 명령하자 한 어머니는 그렇게 자식을 반으로 나누라하고, 한 어머니는 그냥 그 아이를 다른 어머니에게 주고 생명을 해하지 말 것을 간구한다. 누가 진짜 어머니인가? 비록 자식을 영영 떠나보낸다 하더라도 그 생명 만큼은 구하고자 했던 여인이 진정한 어머니이다.

전자의 이별은 사랑이 가짜인 것을 증명했고, 후자의 이별은 사랑이 진짜임을 증명했다. 중요한 것은 이별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여부이다. 그 진심어린 사랑을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친다.


얼마전 대학 동기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방문했다. 침울한 표정의 친구의 얼굴 때문에 처음에는 친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나 슬플까. 부모와 정상적인 관계를 가진 자녀라면 부모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없다. 또한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로 깊은 후회에 잠기기도 한다. 정상이다. 몇 십년을 함께 살며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다. 많은 갈등과 다툼도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실 한 가지 밖에 없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다.

산이가 인생을 불나방처럼 살고 있다. 하고 싶은 건 다 하는데,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한다. 거짓말은 당연하고, 하고 싶은 것은 끝까지 한다. 어릴 적 나 처럼. 태권도 한 달 원비를 오락실에 쏟아 붓고 집에는 학원비를 냈다고 거짓말 했던 적이 있다. 그 거짓말 때문에 중학생이 될 때 까지 끙끙 거리다 참다 못해 고등학생이 되어 말씀을 드렸다.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씀하신 어머니의 반응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일 처럼 느껴지는 수 많은 일들은 이렇게 쉬지 않고 용서받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사건은 증명해 준다. 부모의 참 사랑을.


인간이 죄에 빠져 하나님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 원하지 않는 사건을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로 바꾸어 일 하셨다. 하나님을 끊임 없이 버리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 명령과 순종, 곧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사랑과 용서, 곧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꾸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아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는다. 그러나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그를 팔아 버리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는 에굽의 총리가 된다. 시간이 지나 요셉을 아는 왕이 지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핍박이 더해가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계획하신다. 그러나 그 부름받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미디안 땅으로 도주하게 만든다. 그 곳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그 것을 섬겼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다윗의 때 까지 모세에게 말씀하신 장막을 떠나지 않으셨고, 솔로몬의 손으로 그를 위한 집을 짓게 하셨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 받은 자들을 끊임없이 박해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든 장본인들이 되었다.

이 위대한 설교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죽기 전에 사람들 앞에서 한 설교이다.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이 설교를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끊임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그들을 향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설교를 들은 자들은 마치 그들이 죄가 없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 처럼,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다. 그리고 스데반은 죽으면서 고백한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 까지 이어지는 설교는 이제 아브라함부터 스데반까지 이어지는 설교로 완성이 되었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원수들의 용서를 구한 스데반의 참 사랑을 통해서.

본디오 빌라도는 자신의 지위가 염려되어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었지만, 스데반과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내어 주면서 까지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생명과 바꾼 복음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삶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인 들이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비 상식적인 일은 반드시 우리에게 응해야 한다. 그렇게 미움을 받아야 우리가 하나님께 배운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하신다(요 13:34-35).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준 모양처럼, 우리가 우리의 원수에게 동일한 사랑을 실천하길 원하신다. 이 것으로써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명한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다. 기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복음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들은 복음을 그대로 전하는 일이다. 예정론에 따르면, 귀 있는 자들은 복음을 귀 기울여 듣고 구원에 이른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 1:21). 호주에서 만난 한 전도사님은 자신에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다. 어느날 길을 가다 문이 열린 교회에 들어가서 문득 로마서를 펴고 읽다가 그 자리에서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 했다고 한다. 들을 귀는 이렇게도 반응한다.

둘째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일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 삶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 명령을 토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스도인의 제자로 삼는 것의 시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이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곧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를 미워 하도록 두신다. 그 모든 미움에 대해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응답하는 자신의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해서 말이다. 원수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명령이 아니다. 격려이다. 네가 나의 형상을 닮아가다 보면 언젠가 원수를 너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날이 올거라고, 그리고 그 날에 그 믿음을 기념하며 기쁨의 축배를 들자는 하나님의 격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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