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말씀을먹고 내가 사는 예배자로

by Sue Park

나의 하나님 (말 3:13-18)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서 종종 주변에서 부고 소식을 듣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문자를 보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해줄 수 없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저는 항상 가정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길 기도한다고 문자를 보냅니다.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책임은 우리가 대신 져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과 나 자신의 관계입니다. 구약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이 아닌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백성들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밟은 소수의 백성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그 땅에서 범죄한 왕과 백성들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바랐던 남은 자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가 이스라엘의 자손이 아니라, 그 안에서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믿고 그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보며 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을 믿고 벌벌 떨었다고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여리고 성의 모든 백성들은 두려움에 간담이 녹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리고 성의 모든 백성 중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기생 라합의 집만 살아남고 모두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출애굽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리고 성에 사는 기생 라합은 그 신분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구원과 매우 거리가 멀었으나, 하나님을 따르기로 다짐했던 라합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았으나, 믿음이 없어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보다 더 나았습니다. 나오미와 그 며느리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할 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와 그 남편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베들레헴은 ‘떡집’ 곧 하나님의 양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의 떡 뿐 아니라, 영적인 채움이 있는 곳이 바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그 남편은 흉년을 보고 이방 땅으로 이주하는 결정이 아닌, 그 베들레헴의 의미를 기억하며 그 땅의 회복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결국 이주한 땅에서 엘리멜렉은 죽고 맙니다. 그 땅에서 두 아들이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두 아들도 죽게 됩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이제 각자 갈 길을 가라 말하자, 그 두 며느리 중 한명이 나오미를 붙잡고 늘어지며 말합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의 되리니.’(룻 1:16) 베들레헴에서 도망친 한 가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이름이 구약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두 여인은 모두 이방 여인입니다. 구약에서 이방 여인은 구원과 가장 거리가 먼 여인들이지만, 구원을 넘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받아 신약의 첫 책인 마태복음 1장에 소개됩니다. 구약의 무슨 역사를 더 이야기 하겠습니까? 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육신으로 속한 자들을 두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을 중점에 두고 기록된 것입니다.


1900년대, 처음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기억합니다.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배를 타고 한국에 와서 수 많은 사람에게 성경을 전해 주었습니다. 결국 조선의 관군에 의해 그가 탄 배가 좌초 되는데, 그 때 물 밖으로 던진 성경을 한 아이가 주워 박영식이라는 사람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집을 도배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찾아온 최치량은 벽에 도배된 성경을 읽고 회심을 하게 되는데, 그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습니다. 배를 잃은 토마스 선교사는 결국 육지에서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경을 죽기 전 자신을 참수하는 자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대한민국 최초의 장로인 박춘권입니다. 한 사람에게 성경 한 권이라도 더 전하고 싶었던 토마스의 간절한 바람은 이제 이루어 졌습니다. 이제 모든 가정에 성경책이 한 권 이상은 있습니다. 존경스러운 목사님들의 주옥같은 설교들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해외에 계신 목사님들의 설교도 번역이 되어 언제든 책을 구매해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꿈꾸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900년 대 일어났던 성령의 불같은 역사는 찾아보기 더욱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지는 면도 있으나, 그 이면에, 교회가 무너지고 말씀의 능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오늘날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하나님’이 아닌, ‘너의 하나님’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을 보며 은혜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아멘을 외치고, 성경의 내용과 흐름을 머릿속에 모두 집어놓고 있는데,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변에 말씀이 많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속는 것입니다. 단순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속한 것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서 내가 마실 수 있는 말씀을 찾아 마셔야 합니다. 넘치는 예배 순서 가운데, 내가 사는 예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환경이, 가족이, 심지어 교회가 보장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맞습니까?


의사의 말을 믿지 않으면 약을 지어줘도 먹지 않습니다. 조금 믿으면 어느 정도 먹다 효과가 없으면 그만 둡니다. 그러나 완전히 믿으면, 증상과 상관없이 받아온 모든 약을 끝까지 먹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인내와 도전이 필요한 그 순간, 말씀의 신뢰를 놓지 않고 끝까지 의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가 찾아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약했고, 주변국의 핍박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일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지고 예물이 더럽혀져 하나님께서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중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대결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자기 혼자 남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을 의미 없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우리는 교회를 다니는 자들을 넘어 이처럼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기념책에 기록하며,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아 아끼십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나갈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가는 그것은 1900년 대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자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에 속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참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