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때 강함 되시는 주, 강함을 입고 겸손함으로
약함과 강함 (고후 12:1-10)
설교링크 https://m.youtube.com/watch?v=mtagkZGYETg
지난주에 장례식장에서 상주 역할을 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 장모님의 동생이자, 돌아가신 할머니의 외동아들이신 아내의 외삼촌은 인맥이 매우 넓습니다. 그래서 상을 치루는 동안 방문한 손님들은 거의 모두 외삼촌과 관련된 분들이었습니다. 들어온 화환이 너무 많아 나중에는 사람들이 잘 보는 화환 외에는 나머지를 구석으로 밀어야 했는데, 화환에 적힌 사람의 직위가 높을수록 좋은 자리에 위치되었습니다. 아직 세상에 남아 살아야 하는 외삼촌과 영정 사진 속에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매우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눈을 감기 전 장모님을 통해 복음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살아생전 교회는 쳐다도 보지 않으시던 할머니께서 결국 죽음 앞에서는 마음을 연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귀가 가장 마지막에 닫힌다고 합니다. 삶에서 가장 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듣도록 허락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장모님께서 농담 삼아, 할머니는 평생 하고 싶은 거 다 하다가 죽기 전에 예수 믿어 천국 가서 참 좋겠네,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 믿으라고 말하면 어차피 죽기 전에 믿어서 천국 가는 거 마지막에 믿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마지막이 어떻게 찾아올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보다 내일을 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차고 있는 시계는 24시가 지나가면 자연스레 그 다음날 시간을 시작합니다. 시침은 끊임없이 돌아가고, 숫자는 계속해서 바뀝니다. 그러나 인생은 모레시계와 같습니다. 떨어지는 작은 한 알의 모레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그만큼 우리의 남은 삶은 줄어든 것입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레의 양이 얼마나 남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기지도 않을 사고에 대비해서 보험을 들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며 구원을 등한시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모순입니다. 둘째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분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그를 믿을 믿음을 허락해 주지 않으시면, 죽는 순간까지 믿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시는 목사님께서 임종을 앞둔 한 남성분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그 복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목사님, 저도 너무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다짐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회심하는 기도를 드리는 그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회심이 거짓된 것이 없었는지 돌아보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내 죄와 부족함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죄를 사랑하는 우리의 삶을 보고 다시 돌이켜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이 우리의 삶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 그 다음 문제가 있습니다. 셋째, 바로 성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 믿음으로 마칩니다.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치는 믿음의 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더욱 성숙해지며, 자신의 삶과 입술을 통해 그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믿음으로 시작한 삶이 더욱 큰 믿음에 이르러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는 진정한 제자의 삶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며, 그러한 행복을 통해 우리는 작은 천국을 경험하게 됩니다.
늦게 믿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늦게 믿는 것은 가장 안타까운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해서 인생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결혼하기 전 깨달은 것은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계획과 다르고 심지어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너무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뒤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 뿐 아니라, 자식의 삶도 내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흘러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짐을 주께 맡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오는 평안함은 느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큰 기쁨입니다. 세상은 강자를 씁니다. 그래서 경쟁하고 비교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자를 씁니다. 그래서 겸손하고 섬기고 사랑합니다. 고린도전서 교회에는 부자나 문벌 좋은 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전한 미련한 복음에도 마음이 움직였고, 하나님의 은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쓰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선생들 중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랍비라는 칭호를 쓴 것은 그 나름대로 예수님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소문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그에 대한 해답을 듣지만, 그것을 육신으로 해석하여 예수님 앞에서 망신을 당합니다. 그 곳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니고데모는 영생을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 한 장을 넘겨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장 어두운 시간으로 사람을 피했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가장 밝은 시간에 사람들을 피해 우물에 도착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삶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강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생으로 만나 선생으로 헤어졌지만, 세상에서 약자였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만나 그리스도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도망치며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더욱 약해지기 위해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약할 때가 되었을 때 좌절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의 강함이 역사하게 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니고데모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모습을 갈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많은 것을 가진 자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깨닫고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이 진정으로 복된 자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실 때, 그 강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약함으로 강함 되었으나,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 두 가지를 행했던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2:6-10절 읽기)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를 거절한 것은 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육신의 가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행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가시가 바울의 은혜를 가져갈 만큼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거절될 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받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행하신 큰일을 떠올리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이후로 더 이상 자신의 육체가 가진 부족함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 약함 가운데 기쁨으로 거할 수 있어야, 그 약함이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피하고 싶은 일, 가장 후회되는 일, 가장 못하는 일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