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18
설교링크
https://m.youtube.com/watch?v=Waj3Qnc4ies
무화과나무 이야기(요 15:1-8)
아내가 나라에서 임대해 주는 텃밭에 당첨이 되어 1년간 7m 길이 정도 되는 밭고랑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첫날 가서 씨앗을 뿌리고 여러 사정이 생겨 한 달 뒤에 밭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밭에는 많은 식물들이 자라 있었습니다. 제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상추 하나밖에 없을 만큼 저는 밭과 농사에 대해 지식이 없습니다. 그저 풀이 많이 보이길래, 시들지 않은 것을 기특하게 여기며 다들 잘 자랐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거의 다 잡풀이라고. 얼추 설명을 들으니, 어떤 것을 뽑아야 할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는 우리가 심은 것과 정말 비슷한 것도 있어서 유심히 관찰해서 뽑아야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어머니께 계속 물어보고 확인하면서 뽑아야 했습니다. 누가 봐도 잡초인 것뿐만 아니라, 콩잎, 깻잎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잡초도 결국 뽑히는 것을 보며 마지막 날도 이와 같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봤을 때, ‘와! 정말 잘 자랐다!’라고 생각이 들었던 밭을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바라보니 앙상한 뼈만 남은 것처럼 심긴 식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진짜만 남는구나.’, ‘나는 마지막 자리에 남아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짜를 구별하여 솎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연단의 과정을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겉보기에 풍성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결국 진짜가 없으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시다 배가 고파 길 가의 한 무화 가나무로 가셨습니다(마 21장). 잎사귀가 풍성하여 그 안에 분명히 무화과가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그 무화과는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 무화과나무는 곧 마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무가 말라죽은 것이 아니라, 열매 없는 나무가 곧 죽은 나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 그리고 하나님은 그 농부,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바로 우리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뭇가지는 그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쳐서 불사른다고 합니다. 그것은 가짜 나뭇가지입니다. 그러나 선하고 인자하신 우리 주인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오랜 시간 돌보며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눅 13:6-9) 그 주인이, 혹은 그 주인 아래에서 일하는 과원지기가 나뭇가지가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연단과 고난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우리에게 신실한 주인이 있다는 증거이자, 장차 우리가 맺게 될 열매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율법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 곧 우리가 무엇에 스스로 속고 있는지를 드러내 줍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킨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냐고 물어보기 위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자, 부자 청년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은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까지 칭찬받는 삶을 살았다고 여겼으나,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용기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청년에게 자신이 찾는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주님도 우리의 열매 없음을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때 부자 청년처럼 근심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밭을 가는 심정으로 자신을 돌이켜 새롭게 하시겠습니까? 부자 청년에게 자신의 재산은 자신의 소유에 불과했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고 원하는 대로 쓰는 용도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신앙’과 결부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오랜 시간 동안 전 재산을 당연하게 자신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가짜를 속히 발견해 쳐내지 않으면, 그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열매가 없는 삶에 적응하면, 열매가 맺히는 것을 어색하게 여깁니다. 육신을 사랑하는 삶에 적응하면, 영적인 일을 사모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깁니다. 세상을 입술에 담고 살아가는데 적응하면, 말씀을 입술에 담는 것을 어색하게 여깁니다. 가짜가 진짜가 되어가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있는지 날마다 흔들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짜 열매를 떨궈내고, 진짜 열매가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열매의 여부를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얼마나 민감한 상태를 유지하느냐의 문제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갈망 이상으로, 죄에 대한 아픔이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가꾸어 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에 언급된 무화과나무와 누가복음 13장에 언급된 무화과나무는 모두 잎사귀만 있고 열매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의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습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3장의 무화과나무는 비록 삼 년 동안 열매를 찾을 수 없었으나, 과원지기가 노력하여 다시 결실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살아있는 무화과나무입니다. 열매의 여부가 아닙니다. 물론 참 열매를 바라며 달음질을 하는 신앙생활도 귀하지만, 참 열매 이전에 참 가지가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참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실한 과원지기가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매를 맺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있는지 날마다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알려주는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그것을 깨닫고 아파하며 나에게서 도려내는 과정을 멈추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양 옆에 행악자들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장 39)’ 말합니다. 반면 또 다른 한 사람은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무거운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 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다른 죄인이 예수님을 비난한 반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보며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죄에 대한 반응이 곧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된 것입니다. 그 죄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 비록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마침내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귀한 회개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회개 이후에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위한 회개를 이어가야 합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회심을 한 죄인은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자기 자신의 구원에서 멈추고, 자신의 공력을 시험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 가장 작은 구원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하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구원에는 상급이 있는 구원이 있습니다. 바울은 믿는 자들을 모두 동일 선상에 두지 않고, 그들을 경주를 시작한 선수들로 비유했습니다. 모든 선수들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다르며, 상을 받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