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장 19-23절
져 주는 삶 (고전 9:19-23)
우리 막내 솔이는 아직도 가위바위보를 하면 상대방이 뭘 내는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자기가 이겼다고 소리칩니다. 본인은 주먹만 내면서 마지막에 이겼다고 소리치면 자신이 이기는 줄 압니다. 종종 규칙을 가르쳐 주기 위해 네가 이긴 게 아니라고 말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냥 내가 진 것이라 인정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놀 때, 정말 그 놀이가 인생의 마지막인 놀이인 것처럼 놉니다. 흥분하고, 땀이 흠뻑 젖고, 몰입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놀면서 잘 다치나 봅니다. 그러나 어른은 다릅니다. 운동회가 시작되면 아이들은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는 반면, 어른들은 그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어른들은 몸을 움직이다가도, 땀이 좀 날 것 같으면, 몸이 좀 부딪힐 것 같으면 차라리 게임에서 지는 편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져도 되기 때문입니다. 져도 큰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어떨까요? 어린아이에게 져 주던 어른들은 그 태세를 바꿔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이 되어버립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실 속에서도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져 주듯, 세상 사람에게 져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높이고 낮추는 것은 세상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인간 손에 고난을 당하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결코 예수님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달려 죽을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약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약한 모습을 취하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체 하나님과 동등한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피조물을 꺾고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섬기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져 줄 수 있습니다.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잠자리에 들 때 첫째 산이가 우리 조상이 누구인지 물어봤습니다. 우리의 대를 넘고, 넘고, 넘어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조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분이 하나님이 맞다면, 우리의 삶을 돌보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 맞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서로를 꺾고 이겨야 하는 세상의 방식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기는 일, 자신을 높이는 일,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에 흥분하고, 땀이 흠뻑 젖고, 몰입하여 세상이 말하는 승리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는 복음의 어떠한 의미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도 찾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시험은 어디까지 나를 낮출 수 있느냐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넘어, 원수를 사랑하는 일까지 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말을 오해합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사랑을 쏟아부으면, 그가 우리의 사랑을 언젠가 깨닫고 응답하는 날이 올 것이라 내심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핵심은 원수의 상태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수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로마서 12장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말씀은, 악이 선으로 바뀐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선에 대해 끝까지 악으로 갚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을 행함이 어떠한 악에도 멈추지 않아야 하는 데 있습니다. 선을 악한 것으로 갚는 자들은 그들 머리 위에 숯을 쌓아 결국 하나님의 때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롬 12:20). 저희 어머님은 마음이 여리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십니다. 그래서 과거에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여러 번 돈을 빌려주었으나, 대부분 그 돈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 돈이 꽤 큰돈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부모님께서 힘들어했던 모습들을 생각하면 그 돈을 갚지 않은, 그리고 도망간 사람들이 참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돈을 잃은 것은 큰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일이 있어, 어머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는 누구 돈 떼먹은 적 없지?”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 살면서 후회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부당하게, 힘들게, 고통스럽게 만들어 죄를 지었는지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 것이 후회되는 일이요 회개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우리 머리에 숯불을 쌓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네 아이 모두 귀하지만, 특히 셋째 샘이는 어른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습니다. 샘 이가 아이들과 교제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특징은 상대방의 공격적인 반응과 태도를 유순하게 받아주는 데 있습니다. 동생이 자신을 때려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자신이 받은 간식을 물끄러미 쳐다보면 고민 없이 먹으라고 나눠줍니다. 얼마 전에는 자신이 먹고 싶어서 사놓고 동생이 달라고 하니 맛도 보지 않고 자기는 이게 맛없으니까 너 다 먹으라고 주는 것을 봤습니다. 정말 부당하거나 화가 나면, 상대방을 공격하기보단 울면서 엄마나 아빠를 찾아와 사정을 털어놓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칭찬을 받습니다. 아이들의 관계에서 누가 억울한지, 누가 욕심이 많은지, 누가 양보하는지, 누가 용서하는지 부모들이 이처럼 너무나 잘 안다면, 주무시지도 않는 만유 부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자녀들이 삶을 어떻게 사는지는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원수가 있어야 용서할 일이 생깁니다. 악한 것으로 주는 자들이 있어야 선으로 갚을 일이 생깁니다. 샘 이가 착한 일을 행하고 나면 은근슬쩍 엄마나 아빠를 한 번 곁눈질로 봅니다. 자기도 자기가 칭찬받을 행동을 했다는 걸 아는 겁니다. 선을 행하고 칭찬받을 것을 믿으며 하늘을 보십시오. 그것이 상급인 줄 아는 자들만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고,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만의 신념이 강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한 없이 낮출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린도 전서 8장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에 대한 지혜로운 처사를 말했는데, 먹어야 한다, 혹은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 먹을 때가 있고 먹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모르면 먹고, 알게 되면 혹시라도 네가 알고도 먹는 것으로 상대방이 시험에 당할지 모르지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먹는 것으로 상대방이 실족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맞춰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낮추고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중심의 사고방식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되지만 끊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자유 로우나 스스로 사람에게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자들을 이길 만큼 강하지만, 스스로 약자가 되어져 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라면, 복음을 위해서라면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부족하고 죄를 지어 넘어지기 쉽지만, 선을 붙잡고 이를 행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은 말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 이유는 첫째, 그렇게 조금 내어준 발판을 통해 우리의 중심이 변질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사라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도 바울이 염려하는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악의 모양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시험 들고 실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도우심과 자원하는 심령에 이끌려 기쁨으로 선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기쁨과 감격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순간에서 조차 선을 행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힘든 순간에도 나를 통해 보여 지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기억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십시오.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반드시 갚아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