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e Park Jul 19. 2022

첫 계명

마가복음 12:28-3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모여 예수님을 책잡을 일이 없을까 하여 난감한 질문들을 던지는 가운데, 한 서기관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많은 계명 중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구약에는 율법이 613개 있습니다. 어쩌면 질문자는 예수님께서 계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으로 스스로 넘어지게 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것을 중하다 말하면 다른 것은 가벼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질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계명에서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구약의 613가지 율법을 매번 삶에 적용하고 따르려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율법을 조화롭게 삶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613개가 아니라, 어쩌면 주님께서 기뻐할 만한 6,130개의 율법을 지킬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나누고자 합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거짓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다른 주인을 함께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는 신앙인은 중심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을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유지해도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사도시대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금을 숨겨 영혼이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소유로 있던 땅은 팔기 전에도, 판 뒤에도 그들의 소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땅을 팔고 생긴 돈의 일부를 헌금으로 드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 당시 많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제자들 앞에 내놓기는 했으나,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일어난 일이지, 강제성을 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가 큰 것은, 그들이 마음이 사탄에 미혹되어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일부를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 말합니다. 이 말씀은 비단 헌금 생활에 대해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볼 때, 하나님을 섬기고 재산을 팔아 그 일부를 제자들 앞에 내어놓는다 할지라도,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온전히 향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기독교인이라고 외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도시대 때처럼 중심이 무너진 상태를 분별하고 영혼이 떠나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에 자칭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 1/4 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서류에 적어 내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 책에 이름을 적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자신이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으며, 자신이 친구 된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잃는 큰 사랑을 베풀 것을 예표 합니다. 예수님의 목숨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므로, 우리 역시 예수님을 목숨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신명기 6장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는 없는 말씀이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가올 고난에 맞설 자세를 미리 갖추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 그 고난은 예수님의 죽음과 초대 교회가 당할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 곁에서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고도 목숨이 걸린 순간에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적당한 신앙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 알았지만, 자신의 직위가 걸렸을 때, 그를 대중들에게 넘겨줬던 본디오 빌라도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누리는 무언가를 잃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우리에게 짐을 지웁니다. ‘넌 이걸 사야 해, 넌 이걸 해야 해, 넌 시간이 없어.’ ‘헌금할 돈으로 자식 교육에 투자해야 해, 일주일 동안 너무 바빠서 주일은 쉬어야 해, 주일 예배만 드리면 이제 됐어, 나머지는 시간은 너에게 투자해.’ 어쩌면 우리도 본디오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말하는 ‘적당한 신앙인’, ‘합리적인 신앙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되어있지 않은지 돌아보십시오. 물론 베드로처럼, 마지막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못난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지은 죄와는 다릅니다. 빌라도는 세상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넘겼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랑해서 그가 알지 못했던 그 속에 있는 부족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부족함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고백하며, 다시 주님 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사랑을 경험해야 진정으로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뜻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를 적용해서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 인터넷 통계 사이트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 동안 교회에서 가장 큰 이슈로 자리 잡은 것은 바로 목회자의 기행과 이단 문제였습니다. 목회자의 강력 범죄는 그 자체로서 충격적이지만, 범죄를 저지른 목사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매장하는 일이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지 않고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면 사람이 예수님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단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종종 믿음에 지나친 감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에는 이성과 감성이 함께 공존합니다. 찬양의 멜로디가 우리의 감성을 움직이고, 찬양의 가사가 우리의 이성을 자극하는 것처럼 우리는 두 가지 틀을 가지고 하나님과 깊은 교재를 나누어야 합니다. 때로는 맹목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전도사님께서는 입에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사셨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단 감사한 일이라는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당시 청년부 중 몇몇은 이유도 없는 감사는 진짜 감사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말이라고 지적을 했지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모든 현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주님의 개입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알 수 없는 가운데 감사라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헤아리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 없이 그를 따르는 종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며 참여하는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곁에서 그 말씀의 깊이를 깨달아 사랑의 풍성함을 넉넉히 누리길 원합니다. 그래서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그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모두 없애고 의인을 다시 세우고 시작해도 되는데, 우리의 마음을 강제로 돌이키고 인형처럼 순종하게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를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뜻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길이자, 진정으로 그의 친구가 되는 길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체력이 예전보다 많이 약하다고 합니다. 우리 때는 축구공만 가지고 하루 여섯 시간을 뛰어놀았습니다. 한 경기가 끝나고 벤치에 앉아 쉬다 보면, 다른 팀이 와서 경기하자고 합니다. 3~4 경기를 뛰고 나면 다음날, 혹은 그다음 날까지 다리가 후들거려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운동을 학원에서 정해진 시간만큼 합니다. 자신의 체력을 완전히 다 쏟아 붓기 전에 운동을 마치기 때문에 체력이 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건강이면 건강으로, 은사면 은사로, 물질이면 물질로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쓰러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오는 좌절과 고통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붓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모든 힘을 쏟아부은 아이가 비로소 체력이 늘기 시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은 그리스도인이 비로소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에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아람을 구원한 큰 장군이었으나, 몸에 문둥병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여종이 그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볼 것을 추천합니다. 종의 말이었으나, 그는 낫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왕께 아뢰어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엘리사의 집 앞을 찾아갔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아람에 지배당하고 있는 입장이고, 자신은 아람의 큰 장수이므로 엘리사 보고 자신을 찾아오게 할 수도 있었으나, 나아만은 선지자 앞에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직접 나아만을 맞이하지 않고 종을 통해 말씀을 전해 나아만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습니다. 게다가 깨끗한 강물이 아니라, 하필 더럽기로 소문난 요단강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이나 씻으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비록 불쾌함을 표현했지만, 나아만은 엘리사의 종이 전한 대로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문둥병이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고 자존심을 세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면, 문둥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순종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에는 항상 모든 힘을 다해야 하는 노력이 수반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기적의 문이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팀플레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