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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Jul 24. 2022

올무

시편 119:101-110



시편에는 덫을 의미하는 ‘올무라는 표현이 여러  등장합니다. 덫이 무엇입니까? 잡고자 하는 동물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두어 그것을 유인한 ,  동물을 잡는 것입니다. 덫을 놓는 사람의 눈에는 덫에 걸리는 동물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 동물은 그것을 구분할  있는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지능이 조금 높으면 앞에서 주저합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덫에 걸리게 됩니다. 간혹 몇몇 지능이 높은 동물들은 덫을 알아보고 그냥 피해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피해서 지나간 덫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동물의 무덤이 됩니다.



출애굽기 20장부터 23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모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말씀  가장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며 경고합니다. ‘내가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땅의 주민을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앞에서 쫓아낼지라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 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23:31-33)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게  가나안 땅에는 ‘이방 이라는 덫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를 충분히 피해 갈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가나안 땅의 거민을 내쫓지 않았고 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덫에 알고도 걸린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을 활용하여 나라를 건설하면  도움이  것이라는 판단과 이방 신이 약속해 주는 풍요와 번영에 매료되어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입니다. 덫인  알아도  안에 있는 것에 눈이 팔리면 덫에 걸리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을 순간 망각하는 것입니다. 덫을 놓는 자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 걸리는 자가 무엇에 가장 약한지 말이죠. 요즘 둘째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달라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호기심이 생길 나이기도 하고, 사실 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정말 무섭게 잘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이들이 귀신뿐 아니라,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일이 많아 복음을 이야기하는  좋은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보통 무서운 이야기에서 귀신은  무시무시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귀신이 무섭게 생기고 자신들을 해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이들에게 말해줍니다.


 ‘귀신은 무섭고 피하고 싶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너희가 따르고 싶은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단다.’


덫에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것은 바로 주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101-102 읽기). 올무가 놓여 있는 악한 길을 가지 않는 방법은 바로 주의 말씀과 규례를 지키며 그것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기로 유명한 싱가포르는 안전한 만큼 여행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규칙들이 있습니다. 길거리  뱉기, 냄새나는 물건 들고 대중교통 이용, 밤늦게 음주  도덕적으로 지켜야  세부적인 생활 방침이 법으로 정해져 있으므로, 이를 어겼을  매우  벌금을 물게 됩니다. 결국 법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는 싱가포르 거주자들이 있어 어떠한 나라보다 범죄율을 크게 낮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에 적용되는 수많은 율법을 주신 것은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절기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하고, 제사의 규례를 엄격히 지키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며, 삶에 적용되는 모든 율법을 통해  법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올무가 놓여 있는 악한 길에 빠져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ㅂ살면서 만나게 되는 올무에는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악한 길을 따르며 스스로 걸리는 올무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죄를 사랑해서 스스로 올무를 찾아 나서는 삶입니다. 야고보서 1장은 말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3-15) 야고보는 욕심이 사망이 되는 과정을  단계에 걸쳐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모든 과정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그리고 시간이 걸리는 과정으로 묘사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악한 것을 찾아가려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가지는 순간 그것이 사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서서히 시간이 지나 죄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죄는 서서히 시간이 지나 결국 사망을 낳게 됩니다.  마음에 찾아오는 욕심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이 죄를 낳기 전에, 죄가 사망을 낳기 전에 그것을 분별하고 끊어내는 결단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본문 말씀의 시편 기자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고 고백할  아니라, 104절에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 둘러싸여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악한 곳에 자신의 발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악한 선택을 통해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할  있는 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그러한 선택을 하고 싶은 유혹이 마음에 찾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악한 수단을 통해 당장 겪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안에 놓인 미끼라는 사실을 시편 기자는 너무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유혹을 물리칠  있는 것은 오로지 주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가장 멀리하는 방법은 죄라고 말해주는 율법을 곁에 두는 것입니다. 싱가포르에 발을 밟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정한 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경찰 옆에서는 어떠한 범죄도 저지를  없는 것처럼, 주님의 율법을 곁에 두고 그것을 날마다 묵상하는 자는, 비록 찾아오는 욕심을 막지는 못할 지라도, 그것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 과정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랑해서 마귀가 놓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덫으로 찾아갈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담긴 미끼를 얻기 위해 덫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저질러서는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죄를 사랑해서 스스로 찾아가는 올무입니다. 그래서 이는 우리의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만나게 되는 올무입니다(110).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만나게 되는 올무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믿음을 떨어뜨리고 변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우스 땅에 살았던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은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에 대해 칭찬하고 자랑하자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신께서 허락한 소유물로 인한 것이니 그것을 치면 하나님을 욕하며 떠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것이 있습니다. 욥은 재산이 많아서 시험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너무나  섬겼기 때문에 시험을 당한 것입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욥이 당하는 고난을 자신이 당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받은 복을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지 않으실까 걱정하여 헌금을 내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생활은 사실 욥이 믿음으로 후에 갑절의 복을 받은 것처럼,  복을 위해 믿음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올무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 앞에 가서 욥을 시험하라고 하는  시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우리에게서 가져갈  있는 것은 시험의 대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의 , 건강의 복을 가져가도록 지시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잃음은  자체로서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을 시험으로 받아들인다면, 승리하는 신앙은 잃어버린 복을 되찾는 것이 목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 마귀는 예수님에게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세속적인 질문에 세속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너의 하나님만 경외하라는 말씀으로 답했습니다. 마귀가  올무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세속적인 것을 바라보고 자신을 섬기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욥을 통해 이제 시편 기자의 고백을 우리는 이해할  있습니다(110 읽기). 악인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으나, 그래도 자신은 안전하게 거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서 자신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에서 나오는 기도의 목적이 육신의 회복과 자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과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주어 우리를 해할  있으나, 우리의 생명,  우리가 그분의 자녀 되는 믿음만큼은 마귀가 우리에게서 가져갈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당하는 시험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으리라( 8: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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