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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Park Aug 08. 2022

착한 종

누가복음 19:11-14



착한 종에 대한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등장하고, 누가복음에는 므나를 받은 종들이 등장합니다. 어쨌든 주인은 자신의 종들에게 길을 떠나기  종들에게 목적을 가지고 각자에 맞는 몫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각각 종들이 달란트를 5, 2, 1개를 받아 5, 2, 0개를 남겼고, 누가복음에서는 각각 종들이 모두 동일한  므나를 받아 10, 5, 0개를 남겼습니다. 받은 것으로, 10, 5, 2개를 남긴 종들은 주인으로부터 착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성품을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자는 주인에게 악한 종이라는 꾸지람을 듣고  남은 적은 것까지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말씀에서 등장하는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다시  땅에 오실 날까지 자신이 받은 것으로 반드시 열매를 남겨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등장하는 종들은 각각 받은 만큼 남겼습니다. 5 달란트 받은 자는 5를, 2 달란트 받은 자는 2를 남겼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5:21, 23)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말씀이 동일합니다. 남긴 것이  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것으로 주인이 원하는 결실을 맺은 자는 동일한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열매를 맺는 자가 ‘착한 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주인은 각각  재능대로 종들에게 달란트를 다르게 나누어 주었다고 마태복음 25 15절은 말합니다.  명의 종은 각각 다른 것을 주인에게 받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양이었습니다. 종이 해야  일은 받은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믿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많은 것을 남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종으로서 우리가 주의해야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는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을 의지하는 것을 구분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땅에서 이룰  있는 강한 무기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무기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가장 강한 무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대표적으로는 그의 지식과 신분입니다. 바울은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예루살렘의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혈통으로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강한 율법관과 자신의 신분을 활용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용했으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이성을 믿음과 결합하여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이해시켰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무기가  것은 자신의 약함과 죄였다는 것을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합니다. 만삭 되지 못하여   같은 자신에게도 보이신 주님, 교회를 박해하여 사도라 칭함을 받지 못할 죄인. ‘그러나 내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것은 우리가 받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혹은 나빠 보이는 것이든,  모든 것들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강한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신의 가시가 없어지길 주께   구하였음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은혜가 네게 족하다 ‘. 신앙생활은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앙인은 겉으로 보면 선교를 외치고, 미래를 꿈꾸며, 각종 은사를 구하므로 신령해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은 나중의 것을 보지 않고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는  같지 않아 보일지라도 조바심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뜻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식물에게 물을 주는 자는 물을 주는 일에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주인께서  식물이 자라는 것을 주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비유와 달리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종들이 각각  므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동일한 므나로 10개를 남긴 종에게는  고을을, 5개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게 합니다. 받은 것으로  노력해서  많이 남긴 종에게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비유를 보기 전에 마태복음과 다른 상황이 전제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4절에 왕위를 받게  주인을 미워하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사람이 우리의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주인의 집에 거하는 종과  집에 거하지 않는 백성의 대립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백성은 주인이 떠나자 사자를 보내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종들에게 전달합니다. 마태복음의 종들과는 달리, 누가복음의 종들은 조금  까다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왕위를 받으러 나갔는데, 백성들은 주인이 왕이 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떠난 주인이 다시 돌아올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주인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12절은 주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나라가  곳에 있다고 말합니다. 종들은 주인의 약속을 믿고 따르거나, 주인을 미워하는 백성의 거짓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요즘 ‘가스 라이팅’이라는 용어가 TV 자주 나옵니다.  용어는 1938년에 등장한 스릴러 연극 ‘Gas Light’에서 유래된 ‘정신적 학대 일컫는 용어입니다. 가스등은 함께 가스를 공유하는 집들이 서로 동시에 등을 켜면 한쪽이 약해지는데, 연극의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범행의 알리바이를 위해 아내에게 약해진 가스등이 멀쩡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내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자 남편은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세우고, 계속해서 약한 등이 멀쩡하다는 말을 들었던 아내는 점점 심리적으로 남편에게 지배를 당해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남편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두운 집안을 보면서도 불이 멀쩡하다고 믿게 되는 아내처럼, 현실과 반대되고 거짓된 정보임에도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배되어 온전히 가해자의 말과 판단만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가스 라이팅’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사람은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 가스 라이팅’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나라로 떠난 것은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재림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며 기다리는 그분의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백성들,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의 주인을 미워하고, 그가 왕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가 다시  땅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주인의 말을 우리가 깊이 새기고 기억하지 않는다면, 남편 옆에서 올바른 판단을 전혀 하지 못했던 ‘가스등 아내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잊고 거짓을 진실로 믿으며 살아갈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영적인 일을 무시하는 사람, 예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 신을 믿지 않는 사람  우리의 신앙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복음 전도의 대상이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임은 분명하지만,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혜롭게 대처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에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데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에게 편지할  문안한 성도들의 명단에 들어갈 만큼 그는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세상을 사랑하여 옥에 갇힌 바울의 곁을 떠났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이의 경계를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 곁을 떠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믿는 자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랑비에  젖듯,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길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나 관계  자체로 죄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죄로 향하는 마중물이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며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닮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고린도전서는 말합니다. 덕을 세우지 않는 일에 자유를 느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귀의 ‘영적 가스 라이팅’에 걸려들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서 주인에게 충성하는 일은 마태복음의 종들이 했던 것에 비해 더 높은 충성심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에게 더욱 충성한 만큼 더욱 많은 상급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없는 시간은 주인을 미워하는 백성들이 주는 어려움을 견뎌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행한 모든 행위는 결국 돌아온 주인에 의해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약 100년이란 기간 동안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직 주님의 명령에만 귀 기울였던 노아처럼, 세상 모두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정하고 떠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그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여 하나님께 ‘착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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